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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은 얼마나 내 삶을 지배하는가

[도서] 우연은 얼마나 내 삶을 지배하는가

플로리안 아이그너 저/서유리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우리네 일상에서 늘 일어나는 우연들

우연을 얼마나 내 삶을 지배하는가

 

 

 

책 표지를 넘기면 이내 인간의 삶은 거대한 우연의 놀이터이다.”라는 말이 보인다. ‘거대한 우연이라는 말과 놀이터라는 말이 눈에 들어온다. 그냥 우연이 아니라 지은이는 우연 앞에 거대한이라는 한정어를 붙이고 있다. 우연이 놀이라는 말도 마음에 와 닿는다. 우연이라는 말을 우리는 필연이라는 말과 더불어 익혔다. 필연은 인과관계가 뚜렷한 상황을 나타낸다. 필연의 반대말로 우연을 생각하면 우연은 인과관계가 없는 말로 생각하기 쉽다. 실제 길을 가다가 건물 위에서 떨어진 벽돌을 맞으면 우리는 재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재수가 없다는 것은 벽돌이 떨어진 사건이 우연히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연은 누군가가 나를 향해 벽돌을 던졌다는 걸 가리킨다. 이리 보면 우연에 지배되는 삶은 라는 주체는 어찌해 볼 수 없는 상황에 우리가 자주 빠진다는 걸 나타낸다. 사건은 계속해서 벌어지는데 그 사건을 내가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나는 과연 잘 살고 있는 것인가?

 

로또에 당첨된 사람이 있다. 800만분의 1을 뚫고 로또에 당첨된 이 사람을 사람들은 행운아라고 부른다. 행운이란 필연보다는 우연에 가까운 말이다. 아무리 능력이 출중해도 행운이 많은 사람은 이길 수 없다는 말을 사람들은 자주 한다. 이 말을 우연이 우리 삶을 지배한다는 말로 해석해도 될까? 플로리안 아이그너는 『우연은 얼마나 내 삶을 지배하는가』(동양북스2018)에서 삶은 거대한 행운 게임(8)이라고 선언한다. 성공한 사람들은 자기 능력으로 성공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지만, 거기에는 수많은 우연들이 개입되어 있다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언제나 능력이 있는 사람이 출세하는 것은 아니다. 멍청하고 게으르고 사회성 낮은 사람이 출세를 하는 경우도 있고, 똑똑하고 부지런하고 착한 사람이 실직을 하는 경우도 있다. 누군가를 우연히 만났는데, 그 사람으로 해서 출세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우연은 이렇게 우리네 삶을 지배하는 경우가 많다. 지은이는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조언하는 게 쓸데없다고 생각한다. 똑같은 과정을 겪고도 실패한 사람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기 계발서에 나오는 원칙들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근대과학은 우연을 거부하고 모든 현상을 필연으로 해석한다. 근대과학자들에게 우주는 시계와 같다. 세상은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정확하게 돌아간다. 1시간이 흐르면 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어디에 위치할지 우리를 예측할 수 있다. 세계가 톱니바퀴처럼 움직이는 시계와 같다면 인간은 여기서 어떤 역할을 할까? 인간=과학자는 시계공, 곧 시계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 ‘라플라스의 악마라는 말에 암시되어 있는 것처럼, 근대과학자들은 무한한 양의 정보를 아주 수월하게 받아들이고 최단 시간 내예 복잡한 계산들을 수행하는 초인간적인 지성을 상상했다.”(51) 아이작 뉴턴으로 대변되는 근대과학의 기계론적 세계관은 우주를 시계와 같은 기계로 설정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시계가 흘러가는 원칙을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처럼, 근대인들은 우주가 흘러가는 상황을 정확히 예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계론적 세계관에서도 우연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 우연은 정보가 부족한 상황을 나타내는 개념일 뿐이다. 돌려 말하면 우연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라는 점에서 언젠가는 밝혀질 수밖에 없는 필연이 되는 것이다.

 

정규적 시스템을 중시하는 근대과학에 대한 비판은 카오스 시스템을 상정하면서 시작된다. 적어도 특정한 상황에서는 얼마 동안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게 움직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결국 카오스가 나타난다. 카오스 시스템에서 초기의 오류는 단지 일직선상으로 커지는 것이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63) 그 유명한 나비 효과는 이렇듯 초기 오류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짐으로써 이루어진다. 중국 나비의 날갯짓이 영국에 비를 내릴 수 있다는 우연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카오스 이론은 인정한다. 카오스 이론은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한 사물이 두 방향으로 동시에 움직일 수 있다는 양자 이론 역시 크게 보면 이러한 가능성을 철저하게 성찰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된다.

    

양자물리학이 직면하게 하는 우연의 방식은 상당히 급진적이다. 심지어 양자물리학적인 시스템에 대한 완벽한 지식조차도 측정 결과를 예측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두 번 모두 정확히 똑같은 시작 조건을 만들어낸다고 해도 서로 완전히 다른 두 개의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이것은 라플라스의 악마라는 개념에 심한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의 고정된 결합이 물리학 이론에 의해 처음으로 깨지는 듯 보인다. 양자의 차원에서 근본적인 우연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면, 원인이 없는 결과가 존재하고 그저 순전히 임의로 세상에 내던져지게 된다면, 제아무리 세상의 모든 정보를 갖고 있다는 가설의 악마라도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카오스 이론 역시 우리를 상당히 근본적인 형태의 예측 불가능성에 직면시켰다. 시작 조건을 완벽하게 포착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우리의 모델과 실제 세계 사이의 아주 미미한 편차만으로도 장기적인 예측을 완전히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양자물리학은 어떤 의미로 보면 더 급진적이다. 어떤 양자대상에 대해 그 파동함수 이상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고, 심지어 완전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해도 양자우연성의 재량에 대항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연은 측정을 하는 순간 지체 없이 단번의 양자도약으로 일어난다. (120~121)

 

상자 속에 있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상자를 열어보지 않는 한 양자 중첩 상태에 빠져 있다. 살아있으면서 동시에 죽은 상태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은 완전히 다르다. 생명체라면 살아있으면서 동시에 죽을 수는 없다. 그런데 양자역학은 그것을 인정한다. 정확히 말하면 근대과학이 이야기하는 확실성을 양자역학은 거부한다. 필연이 인과관계에 근거한 확실성을 중시한다면, 우연은 이러한 확실성의 토대를 뿌리부터 뒤흔든다. 양자역학은 모순을 인정함으로써 모순을 부정하는 근대논리학에서 벗어난다. 시작 조건을 아무리 정확히 설정해도 서로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오는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물론 거시적인 세계는 근대역학으로 설명되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미시 세계로 들어가면 근대역학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불확정적인 부분들이 많이 나온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근대역학과 양자역학을 나눈다고나 할까.

 

지은이는 휴 에버렛이 연구한 다중세계 이론을 통해 양자물리학의 신비한(?) 세계를 설명한다. 다중세계 이론은 삶과 죽음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는 상황을 예견한다. 만약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른 세계에서는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인정하면 한쪽에서는 죽음 사람이 다른 쪽에서는 살 수 있다. 가능한 한 적은 수의 기본 요소와 규칙으로 이루어진 간단한 이론들을 좋아하는 근대인이라면 다중세계 이론을 논리가 부실한 말장난이라고 비판할 것이다. 하지만 생각만 약간 바꾸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어떤 세계가 떠오른다고 지은이는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결국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다. 근대인의 사고에 한정되면 우리는 오로지 하나의 세계가 있다는 것만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근대적 사고의 바깥으로 나가면 우리가 사는 세계는 수많은 사건들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다양한 세계로 돌변할 수 있다.

 

우리는 비타민이 부족하면 비타민제를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타민제를 먹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걱정을 하며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한없이 작은 걱정이다. 그런데 우리는 환경이 파괴되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환경을 살리기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 담배를 피면 몸이 상하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담배를 즐겨 핀다. 항생제가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병원에서 항생제를 처방받는다. 우리가 필연이라고 오해하는 모든 일에 우연이 개입하고 있다는 얘기다. 건강에 신경을 쓰는 사람일수록 왜 건강은 더 나빠지는가? 우리는 알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라플라스의 악마처럼 우주는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 움직이므로 우리 몸에 대해 알면 질병에 대해서 모두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우리가 사는 일상이 이렇게 간단한 원리로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것일까? 복잡한 일상을 단순한 원리로 재단하는 순간 그 원리로 포섭될 수 없는 수많은 사례들이 우리를 공격한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우연 덕분이다(260)라는 지은이의 선언은 우리가 사는 일상만 봐도 금방 증명된다. 건강을 챙기는 사람이 자기 일상 하나하나를 논리적으로 처리할 수는 없다. 완전한 지식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완전한 것이 아니다. 완전한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항상 우연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유전학에서는 이를 돌연변이라고 한다. 돌연변이는 분명 우연히 일어난 현상이지만 그 현상으로 해서 한 생명은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얻는다. 우연은 이렇게 우리 삶에 뚜렷한 영향을 미친다. 지은이는 우리가 3차원으로 이루어진 우주에 살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우리에게는 행운이다.”(263)라고 말한다. 2차원에서는 고등생물이 생성될 수 없고, 고차원의 우주에서는 행성의 궤도가 카오스적이고 불안정했을 것이라는 게 그 이유다. 우연으로서 해서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산다. 봄이 되면 피는 꽃 한 송이에도 수많은 우연이 개입되어 있다. 우리가 서로 말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이리 보면 엄청난 기적이다. 우연은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네 일상 가까운 곳에서 늘 일어나는 현상인 것이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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