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과 침묵, 그리고 산책을 듣는 시간
- 정은, 『산책을 듣는 시간』
소리를 듣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 아이 이름은 수지이다. 여자 아이이다. 수지에게 세상은 침묵으로 휩싸여 있다. 수지는 엄마와 수화를 하며 세상과 소통한다. 엄마가 만든 수화라서 아이와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다. 엄마는 바깥세상으로부터 수지를 지키려고 한다. 수지 아빠는 정확히 누구인지 모른다. 쌍둥이 형제 중 하나가 아빠인 건 분명하지만, 엄마는 정확히 누가 아빠인지 얘기하지 않는다. 수지는 노래에 관심이 많다. 소리를 들을 수 없어서 입으로는 부르지 못하는 노래를 수지는 마음속으로 그린다. 입으로 소리를 내야만 노래가 되는 건 아니다. 마음이 노래를 부르면 몸이 저절로 움직인다는 걸 수지는 잘 알고 있다. 수지는 처음에 무용가를 꿈꾸었다. 음악에 맞춰 춤을 출 수 없어 음악가로 꿈을 바꾸었다. 피아노 소리를 못 듣는 건 마찬가지지만, 다른 사람들은 즐겁게 들을 수 있다는 게 이유이다.
엄마를 졸라 피아노 학원에 간 수지는 그곳 어두운 방에서 혼자 피아노를 치던 아이를 발견한다. 아이 눈에서 빛이 번쩍거린다. 피아노를 치는 아이는 왜 눈물을 흘리는 것일까? 수지는 아이와 함께 있고 싶었지만, 엄마가 어깨를 잡아끌어 학원 밖으로 나온다. 엄마와 나란히 걷는다. 엄마와 나란히 걸으면 수화를 할 수 없다. 엄마는 화가 날 때 이렇게 걷는다. 그날 밤이 되어서야 수지는 엄마에게 피아노를 배울 수 있는지 묻는다. 엄마는 수화로 ‘음악이 귀가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두 번 다시 그곳에 갈 수 없다는 뜻이란다. 학원 원장이 소리를 듣지 못하는 수지를 원생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나 보다. 수지가 수화로 채널을 돌리자(다른 학원을 가자)고 말하자 엄마는 수화로 다시 음악이 귀가 되었다고 말하고는 ‘영원히’라는 단어를 덧붙인다. 영원히 피아노를 배울 수 없다는 말이다.
수지는 주희 언니에게 구화를 배우기 시작한다. 듣지 못하는 수지가 말하는 법을 배우는 게 쉬울 리가 없다. 수지는 주희 언니의 몸에 손을 대고 목의 진동을 느끼고, 배의 진동을 느낀다. 입 속에 손을 넣어 혀가 어떤 모양으로 움직이는지 느껴보기도 한다. 자기 배에도 손을 얹고 같은 진동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반복된다. 1년 정도 노력한 끝에 수지는 몇 개의 단어를 발음할 수 있었다. 말을 하는 아이들은 쉽게 배우는 걸 수지는 1년이 지나도 몇 개 단어를 발음하는 수준에 이른다. 말을 못하는 수지에게 말을 배우는 일은 이토록 어려운 것이다. 어렵게 배운 보람이 있어 수지는 입 모양이 정확한 사람과 마주 보고 일대일로 대화를 나누면 약간의 단어를 읽을 수 있었다. 엄마를 비롯한 집안사람들이 좋아한다. 비로소 사람 구실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지는 씁쓸하다. 이전에는 그럼 사람 구실을 못했다는 말인가?
수지는 여덟 살이 되어 특수학교에 입학한다. 수지는 학교에서 수화를 배우고 싶었지만, 수화 수업은 따로 없었다. 선생님들 모두 건청인이었다. 같은 반 친구들로부터 간단한 수화를 몇 가지 배웠다. 수지는 특수학교에서 어딘가 불편한 아이들이 모여 이루는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이 학교에서는 비슷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귀가 아예 안 들리거나 약간 들리거나, 눈이 안 보이거나, 움직임이 불편하거나, 세상을 느끼는 방법이 각자 조금씩 달랐다. 친구를 대할 때마다 그걸 먼저 염두에 두어야 했다. 한발 뒤로 물러서서 먼저 그 친구에게 맞는 방법으로 대화법을 전환했다. 스위치를 바꾸듯. 다양한 친구들의 그 불균형한 아름다움이 나는 좋았다.”(34쪽) 수지는 친구들에게서 ‘불균형한 아름다움’을 본다. 사물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사물에 담긴 의미가 달라진다. 수지는 보이는 그대로 친구들을 본다. ‘장애인’이라는 편견을 지니고 보는 사람들과 친구들을 보는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
수지는 수화를 배우고 싶어 하지만, 엄마는 한결같이 반대한다. 엄마는 수지가 구화를 배우면 다른 사람들처럼 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엄마는 세상 기준에 수지를 맞추려고 하는 것이다. 수지는 엄마가 왜 이러는지 잘 안다. 집 밖에 나가면 장애인으로서 사는 설움을 금방 느끼게 때문이다. 사람들은 수지가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에 화를 냈다. 자기 기준에 맞춰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소리를 잘 듣는 사람들은 차가 오면 알아서 피한다. 하지만 수지는 그럴 수 없지 않은가? 못 들으면 집안에나 있지 하며 혀를 차며 화를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람은 연민이 가득한 시선으로 수지를 쳐다본다. ‘연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인데, 수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불쌍해야 할 이유가 없다.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다만 불편할 뿐인데, 그것을 질병이나 연민과 연결 짓는 사람들이 수지는 못마땅하기만 하다. 엄마가 수화 말고 구화를 배우라는 건 이런 까닭이리라.
지금 수지는 고등학교 3학년이다. 여전히 특수학교에 다니고 커다란 헤드폰을 늘 쓰고 다닌다. 듣지 못하는 아이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이다. 외톨이 유령처럼 다니던 수지는 시각장애인인 한민(어릴 때 학원에서 피아노를 치며 눈물을 흘리던 아이다)과 친구가 된다. 한민은 적색맹이다. 색을 보게 해주는 원뿔세포의 이상으로 색을 못 보고 명암만 구분한단다. 흑백으로 된 세상을 사는 것이다. 한민 곁에는 늘 ‘시각 장애인 안내견입니다’라고 쓰인 옷을 입은 큰 개(이름이 마르첼로다)가 붙어 있다. 한민은 마르첼로에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지극한 애정을 쏟는다. 한민은 마르첼로가 보는 눈으로 세상을 본다. 마르첼로가 이끄는 대로 가다 보면 그는 자기가 가야 할 곳에 이른다. 마르첼로가 있어야만 한민은 일상이 가능하다. 한민이 마르첼로를 믿는 만큼 마르첼로 또한 한민을 믿는다. 마르첼로는 온몸으로 한민을 돌보고, 한민은 온 마음으로 마르첼로를 사랑한다. 수지가 침묵 속에서 노래를 부르는 이치와 같다.
내가 소리를 못 듣는 것에 불편함을 못 느끼듯이 그도 색을 못 보는 것에 불편함을 못 느꼈다. 그는 안 봐도 알 수 있다고 했다. 사람은 냄새만 맡아 보면 알 수가 있다고. 나에게는 좋은 냄새가 나니까,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마크 로스코와 생일이 같았다. 꼭 생일이 같아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지만 그 애는 세상 사람을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지 않는 사람, 이렇게 두 부류로 나누는 것 같았다. 다행히 나는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좋아했기 때문에 한민의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이건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는 좋아하는 것에 비해 싫어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55쪽)
무언가를 보고 무언가를 듣지 못하면 우리는 불편할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무언가를 보고 무언가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지나 한민의 경우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 바깥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은 물론 불편할 수밖에 없다. 비장애인을 기준으로 시설이 꾸려져 있기 때문이다. 수지는 소리를 듣지 못하면서도 마음속으로 노래를 부르고, 한민은 흑백만 볼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림을 좋아한다. 기준을 달리 해서 보면 세상은 다르게 보인다. 그들은 소리를 못 듣고, 천연색을 못 보는 단점이 있지만 비장애인들에게는 없는 장점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수지는 침묵 속에서 자기를 들여다보는 힘이 뛰어나다. 한민은 흑백 명암을 미세하게 구분하는 눈을 지니고 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전자기타 하나를 공동으로 구입해서 밴드를 결성한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수지가 가사를 쓰고, 소리를 듣는 한민이 곡을 붙인다. 세상은 보이는 대로 보인다는 말이 새삼 실감나는 순간이다.
엄마는 수지와 생각이 다르다. 이 세상을 살려면 보고 듣는 일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수지의 인공 와우 수술을 밀어붙이는 이유이다. 이 수술을 받으면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수술 후 한 달이 지나 수지는 소리를 듣게 되었지만,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상상 외로 끔찍했다.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나빴다. 너무 시끄러워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시끄럽다는 표현을 나도 드디어 쓸 수 있게 된 건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래서는 살아갈 수 없겠다 싶을 정도로 세상은 시끄러웠다.”(73쪽) 세상은 정말 시끄럽다. 자동차 달리는 소리, 사람들 싸우는 소리 등이 한데 뒤섞이면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니까. 그런 소리를 들으며 자란 사람이야 상관없지만, 수지야 어디 그런가? 조용한 세상에서 살다가 이렇게 시끄러운 세상으로 나왔으니 “소리가 들린다기보다는 소리가 온몸을 때리는 것 같았다.”(73쪽)라는 표현을 할만도 하다. 방향 감각이 이상해져서 종종 땅이 뒤흔들려 화장실에 가다 쓰러진 적도 여러 번이라고 한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수지가 주변 사람들로부터 독립하는 상황을 그린다. 수지 스스로 사람들을 떠난 게 아니라 사람들이 수지를 먼저 떠난다. 멋쟁이 할머니가 암에 걸려 돌아가시자 엄마 또한 자기 삶을 찾고 싶다며 외국으로 떠난다. 엄마는 수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금껏 공허하게 살았는데 더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157쪽)라고 말한다. 엄마에게는 엄마의 인생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수지는 자기를 떠난 엄마에게 섭섭한 감정을 느낀다. 하나뿐인 고모도 인도 여행을 떠난다며 수지를 떠난다. 수지 곁에는 이제 한민만이 남았다. 소설 제목인 ‘산책을 듣는 시간’은 수지가 한민과 더불어 하는 일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이 한민과 함께 산책을 하며 자기 이야기를 하는 프로그램이다. “나는 세상을 낯설게 보게 하고 싶어. 사람들 내면에 이미 있지만 자각하지 못하는 낯선 감각을 깨우쳐 주고 싶어”(169쪽)라는 한민의 말에 이 프로그램을 통해 한민과 수지가 무엇을 하려는지 잘 나와 있다.
산책에 참가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누군지 아무도 묻지 않아서 좋아요. 직업이 뭔지 어느 학교를 나왔고 어디에 사는지 자신에 관해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저 그 순간 눈에 보이는 것들을 그대로 말해 주기만 하면 되는 시간이 치유에 도움이 되었어요.”(171쪽) 낮에는 선글라스를 써야 하는 한민에게 참가자들은 자기가 본 풍경을 들려준다. 한민은 다른 얘기를 하지 않고 그저 듣기만 한다. 보이는 사람은 말을 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은 즐겁게 듣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상황이다. 작가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펼치는 이 침묵과도 같은 대화를 ‘산책을 듣는 시간’으로 표현한다. 참가자는 말을 하면서 침묵을 하고, 한민(혹은 수지)는 침묵을 하면서 즐거이 말을 전한다. 침묵과 말은 다르면서 같다. 장애인과 비장애인도 다르면서 같다. 산책을 보는 시간이 산책을 듣는 시간으로 변주되는 찰나에 많은 사람들이 침묵 속에서 울리는 자기 목소리를 듣는 셈이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