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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배달

[도서] 특별한 배달

김선영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순금의 기억을 찾아 길을 떠나다

- 김선영 장편소설 『특별한 배달』

 

 

 

누구에게나 특별한 기억이 있다. 좋은 기억일 수도 있고, 나쁜 기억일 수도 있다. ‘트라우마라는 말로 표현해도 좋겠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는가 하면, 무심결에 잊고 지내다 어느 순간 갑작스레 떠오르는 기억도 있다. 김선영은 『특별한 배달』(자음과모음, 2018)에서 이러한 기억을 다루고 있다. ‘특별한 배달이라는 제목은 특별한 기억이라는 말로 풀어도 좋다. 기억은 지나간 과거를 떠올리는 데서 시작된다. 시간 문제가 개입되어 있다는 말이다. 시간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대상이다. 흐르는 시간의 어느 지점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을 하며 산다. 지금 우리가 사는 모습은 그때 그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모르거나, 아니면 인정하려고 하지 않을 뿐이다. 아이라고 다를 거 없고, 어른이라고 다를 거 없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태봉과 슬아는 현재 인생을 바꾸기 위해 기억을 찾아 길을 떠난다. 태봉은 대기업을 그만둔 후 삶의 활력을 잃은 아버지와 함께 산다. 아버지 모습에 실망한 엄마는 수 년 전에 집을 나갔다. 태봉이 열두 살 때다. 태봉은 아버지도 밉고, 엄마도 밉다. 요즘 사회에서 부모 배경 없이 학교를 다니는 건 얼마나 힘든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태봉은 미래 희망란에 잉여인간이라고 썼다. 잉여인간은 말 그대로 쓸모없는 인간을 가리킨다. 학교라는 제도에서 보면 공부 못하고, 거칠기만 한 태봉은 쓸모없는 인간이다. 그는 스스로 학교에서 왕따가 된다. 백수인 아버지와 집을 나간 엄마를 보면 집안 상황이야 말할 게 없다. 공부라도 잘 하면 좋은데, 태봉은 공부에도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일진회 학생들과 어울리는 것도 아니다. 태봉은 잉여인간처럼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살려고 한다. 하지만 이런 태봉을 사람들은 내버려두지 않는다. 일진회 학생들은 태봉의 주먹에 관심을 갖고, 담임은 문제아를 교화시키겠다는 일념으로 태봉을 괴롭힌다.

 

슬아는 성적이 전국(전교가 아니다) 1등이다. 태봉과 중학교 동창이기도 한 그녀는 입양아라는 조건 때문에 숨 막히는 생활을 한다. 슬아 엄마는 아이들을 통해 자기 신념을 펼치려는 인물이다. 슬아의 성공을 자기 성공으로 생각하는 엄마로 해서 슬아는 오로지 공부에만 매진한다. 슬아는 공부를 못하면 자신이 파양될 처지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슬아처럼 엄마 방식을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던 동생 상하가 파양되었다. 엄마는 상하를 파양한 이유가 무엇인지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상하에 대한 얘기를 금지했을 뿐이다. 공부 스트레스로 생긴 기면증을 슬아는 엄마에게 숨긴다. 자기 방어다. 슬아는 지금 사는 세상과는 다른 우주가 있을 거라는 평행 우주를 생각하며 삶을 견딘다. 이 세상에서 슬아는 양부모와 살지만, 다른 세상에 있는 슬아는 친부모와 행복하게 살지도 모른다. 상상을 통해서라도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태봉과 슬아는 어찌 보면 비슷한 상처를 지니고 있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려졌다는 기억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그만큼 이 현실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공부로는 결코 친해질 수 없는 두 사람이 친구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무의식 깊숙이 자리한 기억을 두 사람이 끌어내는 과정에 주목하고 있다. 6차선 도로에 구멍이 뚫리면서 오토바이와 함께 실종된 배달원 김일구가 열쇠가 된다. 경찰과 언론은 실종으로 결론지었지만, 김일구는 정작 허물어진 고향 집에 숨어 있었다. 그는 도로에 난 큰 구멍으로 떨어지는 도중 자기 과거를 본다. 시간이 비틀리면서 김일구는 죽을 상황을 모면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셈이다. 슬아는 평행 우주 이론에 근거하여 이를 이해한다. 그리고는 구멍이 뚫린 도로에서 김일구와 같은 방식으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려고 한다. 죽음을 각오해야 할 일이다. 태봉은 처음에는 슬아의 제안을 거부했지만, 결국은 슬아와 함께 이 모험을 감행하기로 한다. 지금 사는 삶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두 사람은 그만큼 컸던 것이다.

    

순간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태봉은 머리칼이 주뼛 일어설 만큼 소름이 돋았다. 그 순간 자력에 이끌리듯 푸른 알갱이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노란 빛살들에 섞여 쭉쭉 빨려 들어갔다. 속도가 느껴질 만큼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강한 형광빛이 눈과 눈 사이를 관통하는 것 같았다. 광선 칼에 이마빡을 가격당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태봉은 기어이 눈을 감고 말았다. 눈을 뜰 수가 없다. 그 빛은 예리한 검의 양날처럼 너무나 위협적이었다. (……)

태봉의 눈앞에도 길지 않은 지난날들이 지나갔다. 엄마가 짐을 꾸린 뒤 손을 내밀었을 때 고개를 젓는 태봉의 모습이 보였다. 어스름 저녁이었다. 불 켜지 않은 반지하 방에 어둠이 잠입해 들어올 즈음 엄마가 재차 손을 내밀어도 태봉은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168)

    

다른 세계로 접어드는 즈음, 태봉은 무의식에 저장된 기억 하나를 떠올린다. 엄마가 짐을 꾸려 집을 나갈 때 상황이다. 지금까지 태봉은 엄마가 자기에게는 한 마디 말도 없이 떠났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무의식에 새겨진 기억은 태봉이 엄마와 함께 떠나길 거부했던 것으로 나온다. 열두 살 때 벌어진 일을 태봉은 왜 이리 까마득히 잊은 것일까? 트라우마에 다가가는 걸 극도로 꺼렸기 때문이다. 태봉 스스로 엄마 손길을 거부한 걸로 기억한다면, 원망할 사람이 사라지는 게 아닌가? 태봉은 혼자서 사는 삶을 그리워했다. 사람들과 따로 떨어져 살면 마음이 참 편할 거라고도 생각했다. 잉여인간이 되고자 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잉여인간에게 누가 관심을 내보이겠는가? 이렇게 그림자처럼 살다 보면 시간이 흐를 것이고, 그러면 자기에게 주어진 생을 다 살 거라고 생각한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면에는 엄마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트라우마가 작용하고 있다고 하겠다.

 

슬아 또한 태봉과 비슷한 경험을 한다. 슬아는 이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경계에서 손뼉 치는 보모를 본 척도 않고 엄마를 향해 기어가는 자신(아기)을 본다. 기억 속에 떠오른 엄마는 지금 엄마이다. 그럼 슬아는 입양아가 아니란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슬아 엄마는 분명 불임이라는 말을 사용했으니까. 며칠 만에 집에 돌아온 슬아는 엄마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자기를 왜 입양했느냐고 묻는다. 엄마 입에서 의외의 말이 나온다. 엄마가 슬아를 선택한 게 아니란다. 슬아가 엄마를 선택한 거란다. 엄마는 원래 다른 아기를 데려오려 했다. 데려올 아기가 목욕을 할 즈음, 슬아가 엄마 무릎으로 기어오른다. 수녀님과 보모가 손뼉을 치며 불러도 슬아는 엄마 무릎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거기다 목욕을 하고 나온 아기는 슬아 엄마를 보고는 뻗대며 울기 시작한다. 슬아 스스로 자기 운명을 바꾼 셈이다.

 

태봉과 슬아는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삶 때문에 무척이나 괴로워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새로운 세상을 찾아 떠난다. 새로운 세상을 찾으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죽음을 꼭이 육체적인 죽음만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두 사람은 도로에 뚫린 큰 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모험을 통해 새로운 기억과 만나게 된다. 새로운 기억과 만났다는 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되새길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태봉은 이 기억으로 엄마와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고, 슬아 또한 자신이 선택한 인생을 새로이 들여다보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은 진실만 보려고 한다. 시선을 달리 하면 다른 게 보이는데도, 우리는 지금까지 보아 온 시선을 고집한다. 아이라고, 어른이라고 다르지 않다. 시선을 바꾸면 보이지 않던 진실이 보인다. 물론 그러려면 자기가 보고 싶지 않는 진실과 대면할 용기가 필요하다.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이런 용기가 날 리 없다. 무의식에 숨은 순금의 기억을 찾기 위해 벌이는 두 사람의 사투를 우리가 기릴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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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워블로그 춍춍

    자신의 믿음에 의문을 품는것은 죽음을 각오할만큼 큰 용기가 필요할만큼 어려운 일인거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슬아와 태봉에게 큰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앞으로는 선택을 하면서 힘든 순간도 있겠지만 잘 헤쳐나가리라 믿고싶네요^^

    2018.10.01 21:36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오르페우스

      절실한 만큼 쉽게 포기하는 일은 없겠지요ㅡ.^^~

      2018.10.01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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