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사는 지혜, 생명의 진화
- 칼 짐머, 『진화』
다윈의 진화론이 처음부터 인정받았던 것은 아니다. 지금도 진화론과 창조론이 다툼을 벌이고 있듯,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할 당시 학계는 신이 생명을 창조했다는 생각을 정설로 인정하고 있었다. 진화론은 자연선택의 원리에 바탕을 둔다. 이 책의 서문을 쓴 스티븐 제이 굴드는 자연선택을 세 가지 원리로 설명한다. “첫째, 모든 생명체는 실제로 살아남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수의 자손을 낳는다. 둘째 같은 종에 속하는 개체들이라도 저마다 다른 형질을 갖는다. 셋째, 이런 형질 중 적어도 일부는 자손에게 전달된다.”(12~13쪽) 주변 환경에 잘 적응한 생명만이 자기 유전자를 후손에 남긴다. 진화론은 지적설계론으로 이름을 바꾼 창조론과 맞서 생명의 탄생 과정을 되짚고 있다. 지적설계론은 신이라는 지적 존재가 생명 탄생에 개입하는 과정을 풀이하고 있다. 진화론을 주장한 다윈이라고 해서 이러한 창조론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자연에 나타난 신의 섭리’라는 식으로 당시 과학자들은 신의 섭리가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용불용설(用不用說)’을 주장한 라마르크는 종은 자신이 사는 환경에 적응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린의 조상을 예로 들어, 지금 우리가 보는 기린은 높은 곳에 있는 잎을 먹기 위해 목을 계속 늘이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탄생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또한 나무에서 내려와 똑바로 서서 들판을 걷기 시작한 원숭이로부터 인간이 태어났다고 추측했다. 당시 자연사학자들은 라마르크의 이런 주장에 과잉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라마르크가 인간을 비롯한 자연 전체를 맹목적인 지상의 힘에서 비롯된 산물로 격하시킨다고 보았다. 신이 사물을 창조했다는 생각에 젖은 사람들이 신을 벗어난 지상에서 생명의 기원을 찾은 진화론자들을 인정할 수는 없었을 테다. 찰스 다윈은 바로 이런 시대에 『종의 기원』이라는 기념비적인 책을 냈다. 사고과정부터 책이 발간되는 시점까지 다윈은 무수한 사람과의 편견과 맞서야 했고, 책을 낸 이후에도 이런 편견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윈은 무서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가슴이 뛰고 복통에 시달리기도 했으며 한밤에 악몽에 시달리다 깨기도 했다. 그는 핀치나 개미핥기를 지배하는 법칙이 인간에도 적용되리라고 생각했다. 이제 다윈은 인간을 단지 지능이 뛰어난 동물의 한 종에 불과하다고 보기 시작했다. 노트에 그는 이렇게 썼다. “어떤 동물이 다른 동물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습다. 사람들은 지능을 가진 인간의 탄생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를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나 지능 아닌 다른 감각을 지닌 곤충의 등장은 더욱 놀랍다. 아름다운 초원과 숲으로 덮인 지구 위에 사는 존재라면 어떻게 감히 지능이 세상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아마 인간은 핀치처럼 진화의 산물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다윈은 동물원에 가서 제니라는 이름의 새로 들어온 오랑우탄을 찾아갔다. 그는 아기들에게 볼 수 있는 표정을 제니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노트에 이렇게 썼다. “인간은 원숭이에서 왔는가?” (79~80쪽)
다윈의 무서운 생각은 “인간은 원숭이에서 왔는가?”라는 물음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지적설계론에 의하면 인간은 신이 만든 최후의 걸작품이어야 한다. 신은 걸작품을 상황에 따라 수정할 수는 있지만, 인간을 다른 생명들과 동등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신을 빌미로 한 인간중심주의인 셈이다. 다윈은 인간이 핀치처럼 진화의 산물에 불과한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다윈이 살던 당시에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지금 우리는 모든 생물을 낳은 기원에 유전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생명의 기원을 좇아 내려가다 보면 인간은 저 바다 밑바닥에 있던 세균을 어버이로 두고 있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 속에서 펼쳐진 진화의 결과로 인간이라는 종이 만들어졌다. 신을 등에 업은 인간들은 인간을 모든 종의 위에 세우려고 하지만, 인간이 다른 생명과 어버이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은 이미 과학적 사실로 밝혀졌다. 인간중심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인정하기 싫어하는 내용이어도 어쩔 수 없다. 인간이라고 해서 진화의 역사에서 외따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화산이 폭발해도 어떤 종의 개체들은 살아남는다. 살아남은 것들은 번식하고 적응에 실패한 것들은 죽어간다. 다윈은 “자연은 내장 기관, 모든 외관상의 차이, 생명의 메커니즘 전체에 작용한다. 인간은 오직 이익만을 위해 교배하지만 자연은 자신이 돌보는 생명의 이익을 위해 교배한다.”(99쪽)라고 말한다. 자연선택이 특정한 형질을 가진 집단에 오래 작용하면 그 집단은 독립된 종으로 탈바꿈한다. 경쟁은 같은 종의 개체들에게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다른 종의 개체들과도 일어난다. 경쟁은 치열해서 둘 중 하나는 밀려난다. 다윈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책에 삽화를 그린다. 바닥에는 원시 생물종들이 있어서 큰 나뭇가지처럼 뻗어나간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작은 가지를 쳐나가는데, 대부분의 가지는 조금 자라다가 성장을 멈춘다. 경쟁에서 밀려나 멸종하는 것이다. 이로 보면 생명은 ‘거대한 존재의 사슬’이 아니라 성장하는 나무모양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유전자가 만들어내는 생명의 신비를 과학은 이제 막 밝히기 시작했다. 이에 따르면 인간을 비롯한 동물은 대부분 몸을 만드는 유전자의 표준 도구 상자라고 할 만한 것을 갖고 있다. 이 상자에는 동물 몸의 형상을 결정하는 도구들이 들어 있다. 종이 달라도 이 도구 상자는 놀랍도록 유사하는 기능을 하는데, 이를테면 쥐의 눈이 성장하는 것을 관장하는 유전자를 파리에게 주면 같은 일을 해낸다. 1980년대 들어 생물학자들은 돌연변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혹스(Hox) 유전자를 발견했다. 혹스 유전자는 다른 유전자들을 끄고 켜는 메인 스위치 역할을 한다. 초파리 실험에서 처음 발견된 혹스 유전자는 이후 개구리, 쥐, 인간, 따개비, 불가사리 등 모든 종류의 동물에게서 발견되었다. 거기다 혹스 유전자의 일부는 동물의 종류에 관계없이 거의 똑같았다.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동물들이 서로 크게 달라지는 과정에서도 기본 도구는 수억 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은 것이다.
다윈의 시대 이래 고생물학자들은 다윈이 생각한 대로 많은 화석을 찾아냈고 심지어 그 화석이 어느 시대의 것인지 정확히 알아내는 방법도 개발했다. 그러나 새로운 증거가 발견될수록 멸종에 관해서만은 다윈이 틀렸음이 분명해졌다. 대량 멸종은 현실이었다. 지질학적으로 보면 한순간에 해당하는 시간에 지구상 생물종의 90퍼센트가 파괴된 적도 있었다. 이런 파괴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것들은 화산, 운석, 대양과 대기의 갑작스러운 변화 등이다. 이런 현상이 일어날 때마다 전 지구상의 생명은 고통을 겪었다. 현상의 강도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생명은 마치 골판지로 지은 집처럼 무너졌다. 일단 대량 멸종이 일어나면 당초의 다양성을 회복하는 데는 수백만 년이 걸렸다. 대량 멸종의 결과 큰 변화가 일어나, 다시는 옛날의 생태계로 돌아가지 못하기도 한다. 대재앙으로 지구를 지배하던 생물종이 완전히 사라지고 새로운 것들이 빈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사실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게 된 것도 과거에 있었던 대량 멸종 덕분인지 모른다. (229쪽)
이 책에서 지은이는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세계관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진화론 입장에서 지적설계론을 비판하는 한편으로 지은이는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게 된 배경을 다른 종의 대량 멸종에서 찾고 있다. 생물종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 인간이 자기 능력으로 지구를 지배했다는 주장을 비판하고 있는 셈이다. 영국의 자연사학자인 존 필립스는 화석이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 등 3개의 큰 시대로 나뉘며 그 시대들 사이에 대량 멸종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대량 멸종은 말 그대로 거의 모든 생물종이 사라지는 상황을 일컫는다. 아주 짧은 시간에 생물종에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자연현상으로 지은이는 화산 폭발을 꼽는다. 화산이 폭발하면 용암과 함께 거대한 황산화물의 구름이 솟는다. 대기 중으로 들어간 황산화물 분자들은 조그마한 입자 상태로 떠나며 안개 같은 것을 형성해 햇빛을 반사하고 지구의 기온을 떨어뜨린다. 이 입자들이 황산이 섞인 산성비가 되어 지상으로 떨어지면 토양은 당연히 오염된다.
오염된 토양에서 나무는 자랄 수 없다. 나무가 죽으면 거기에 의존해 살던 곤충들이 멸종하고, 수많은 초식동물들도 같은 길을 걸을 것이다. 화산 폭발은 바다 환경에도 영향을 미쳐 바다의 미묘한 화학적 균형을 깨뜨릴 수도 있다. 화산 폭발로 기후가 바뀌면 물속에 갇혀 있던 이산화탄소가 위로 올라오고, 얕은 데까지 도달한 이산화탄소로 인해 해양 생물의 혈액이 산성화되어 대부분의 생물종이 멸종된다고 지은이는 이야기한다. 대량 멸종이 이루어진 이후는 어떨까? 지은이는 자바섬과 수마트라섬 사이의 순다해협에 있는 크라카타우섬을 예로 든다. 빽빽한 밀림으로 뒤덮여 있던 이곳은 화산이 폭발하면서 섬의 3분의 2 정도가 사라졌다고 한다. 9개월 후 학자들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섬에서는 동식물의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 년 후 생명이 다시 이 섬을 덮기 시작했다. 화산 폭발 후 섬에서 자란 생명들은 이전에 살던 생물종과는 다른 종들이었다. 생태계는 복원되는 과정에서 옛날의 생명을 그대로 복사하지 않는다는 걸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지은이는 약 5만 년 전부터 인간에 의해 이루어진 멸종의 역사에 주목하고 있다. 인간이 발을 디딘 대륙마다 수많은 종들이 사라지는 일이 벌어졌다. “마하울레푸에서 인간은 숲을 파괴하고 동물을 사냥하는 것 말고도 또 한 가지 방법으로 멸종을 불러왔다.”(279쪽)는 진술에 드러나는 대로, 인간이 들어서는 장소마다 숲은 어김없이 파괴되었다. 거기다 인간은 쥐, 닭, 개, 염소 같은 생물학적 침입자를 들여와 생명들의 삶터를 교란했다. 이를테면, 인간이 나타나기 전 하와이에는 평균 3만 5,000년마다 하나의 새로운 종이 도착했다. 폴리네시아 사람들이 카우아이로 들어오면서 많은 동물들이 따라 들어왔고, 이에 따라 그 지역의 생태는 급속도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백인들이 이주하자 새로운 종들은 더욱 빨리 하와이로 유입되었다. 1826년에 포경선이 말라리아모기를 하와이로 가져와 하와이 새들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현상은 전 세계로 퍼졌고, 산업혁명과 더불어 인간은 생물 다양성을 해치는 주범으로 인식되고 있다.
인간이 들어서는 대륙마다 생명 다양성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지은이는 ‘공진화(共進化)’에서 그 이유를 찾고 있다. 공진화는 한 종의 진화가 다른 종의 진화를 촉진하는 것을 말한다. 생물종 다양성의 원천인 공진화는 파트너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수백만 개의 새로운 종을 낳기도 한다.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위해 벌인 인간의 노력 역시 인간과 바이러스 사이에 벌어진 (부정적인) 공진화라고 볼 수 있다. 꽃과 곤충 사이에 벌어지는 공진화가 종을 퍼뜨리는 긍정적인 공진화를 일으켰다면, 인간과 곤충(해충) 사이에 벌어진 공진화는 부정적인 공진화에 해당된다. 인간은 해로운 벌레가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이려고 한다. ‘박멸’ 대상이 된 해충이나 바이러스가 가만있을 리 없다. 살충제에 내성이 생긴 해충은 더욱 강력한 해충이 되어 인간을 더욱 더 괴롭힌다. 바이러스도 마찬가지다. 내성이 생긴 더욱 강력한 바이러스가 나와 인간을 초죽음 상태로 내몬다.
하지만 살충제는 공진화에 비하면 서툰 수단일 뿐이다. 식물과 곤충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서 서로에 대해 효과적인 공격 무기를 개발한다. 그러나 화학자들이 새로운 살충제를 개발하려면 몇 년씩 걸리고, 이들이 연구를 진행하는 중에도 내성을 가진 곤충은 농작물에 큰 해를 끼친다. 이런 곤충들 때문에 농부들은 새로운 살충제를 사기 위해 돈을 더 써야 한다. 식물이 만들어내는 자연적인 방어 시스템과 달리 살충제는 유기물에서 새로운 토양을 만드는 데 반드시 필요한 땅속 식물인 지렁이 같은 것도 죽인다. 그리고 몇 년씩 잔류하기도 하고, 수천 킬로미터씩 이동하기도 하며, 농장에서 일하다 중독된 사람들을 죽이기도 한다. 찬반이 엇갈리고는 있지만 살충제를 흡입하는 것이 몇 종류의 암과 관계있다는 암울한 증거도 나타나고 있다. (315쪽)
더불어 사는 길이 아니라 혼자 사는 길을 선택한 인간의 모습이 ‘살충제’를 사용하는 방식에 극명하게 드러난다.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 인간은 살충제를 더 많이 땅에 뿌렸다. 살충제는 벌레만 죽이는 게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 또한 죽인다.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인간이 전염병에 대항해서 개발한 항생제도 살충제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항생제에 내성이 생긴 세균들이 생기면서 인간은 세균들과 더욱 힘든 싸움을 벌여야 한다. 지은이는 인간이 처한 막다른 길을 벗어나는 대안으로 ‘병원체 길들이기’라는 방법을 제안한다.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야생 늑대를 개로 길들인 사례가 이에 해당된다. 기생생물을 ‘가축’으로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란다. 말라리아를 일으키는 플라스모디움이라는 병원체를 길들이려면 창문에 방충망을 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모기에 물리는 사람 수가 줄어들면 덜 치명적인 변종이 치명적인 변종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게 지은이의 생각이다.
생명은 종족 번식을 위해서라면 어떤 위험도 감수한다. 수컷 공작은 포식자에게 노출되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암컷 앞에서 꼬리를 활짝 펼치고, 생식능력이 없는 개미는 혈통 상으로 자기와 가까운 존재를 돕는다. 더 많은 정자를 남기기 위해 암컷에게 기꺼이 잡아먹히는 수컷 거미의 이야기는 종족 번식을 위해 생명들이 벌이는 지난한 여정을 보여준다. 유전자 이타주의로 알려져 있는 이런 현상은 그만큼 자기 혈통의 종족을 번식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에둘러 드러낸다. 새로이 지배자가 된 사자는 자기 혈통이 아닌 새끼들을 가차 없이 죽인다. 자기 혈통을 퍼뜨리기 위해서이다. 침팬지들도 마찬가지다. 지은이는 이와 달리 보노보는 싸움 대신 사랑을 선택한다고 이야기한다. 보노보는 연중 안정적으로 과일을 찾을 수 있는 습한 정글에 산다. 나무가 듬성듬성한 숲에 사는 침팬지와 다른 생존 조건이다. 먹이를 쉽게 구할 수 있는 보노보 집단에서는 암컷이 지배자가 된다. 암컷이 지배자인 집단에서는 어린 새끼를 죽이는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