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대는 어떤 온도를 지니고 살아갈까?
- 이상권 외, 『십대의 온도』
‘십대의 온도’라는 제목으로 6편의 소설이 묶여 있다. 십대는 어떤 온도를 지니고 있을까? 따뜻할까? 차가울까? 아니면 온도를 아예 느끼지 못하며 살아갈까? 유치원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공부’에 목을 매는 아이들을 보면 온도를 얘기하는 일 자체가 우스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부모가 계획한 길을 따라가고, 누군가는 그저 그런 인생을 따라가고, 또 누군가는 무관심 속에 서서히 메말라간다. 계급이 사라진 시대에도 ‘출신 성분’은 여전히 아이들을 따라다닌다. 산동네에 사는 아이가 아파트에 사는 아이와 어울리기는 힘들다. 아이들끼리 친해도 부모들이 그냥 놔두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는 부(富)를 경쟁력으로 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만큼 끼리끼리 어울리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체제가 있을까? 자본주의는 개인의 욕망을 끊임없이 부추긴다.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만이 자본주의적 삶을 즐길 수 있다.
십대에게 경쟁에서 이기는 것은 우선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다. 자식을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부모들은 온갖 지원을 마다하지 않는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아이들은 인형일 뿐이다. 몸속에 피가 도는 인형이다. 이상권은 「어느 날 갑자기」에서 몸속에 피가 도는 인형이 ‘어느 날 갑자기’ 일탈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주인공 은진은 남자친구 시우를 자꾸만 멀리한다. 은진은 공부를 잘하고, 은진보다 두 살이 많은 시우는 공부를 못한다. 은진 엄마가 나서 은진과 시우를 떨어뜨려 놓는다. 엄마 의견을 무시하기 힘든 은진은 엄마와 시우 사이에서 갈등을 한다. 쉽게 해결될 갈등이 아니다. 와중에 지방에 사는 지수에게 연락이 온다. 만난 지 5년이나 된 친구다. 지수는 무심결에 “진짜 얼굴 한 번 보기 힘들어. 근데 대학 간다고 볼 수 있겠니? 환갑 지나서 본다면 모를까? 다 늙어서 말야.”(11쪽)라고 내뱉는다. 그 말을 듣고 은진은 지수를 만나러 지방에 내려가기로 갑작스레 결정한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일탈이고, 아이 입장에서 보면 자유를 향한 몸부림이다.
지수를 찾아 D시로 가면서도 은진은 엄마에게 연락을 하지 않는다. 엄마에게 전화가 와도 받지 않는다. 자기보다 두 뼘이나 키가 큰 지수를 보는 것만으로도 은진은 위안을 받는다. 물론 은진은 갑작스런 일탈이 두렵다. 지수와 시간을 보내면서도 그녀는 서울로 가는 막차 시간을 자꾸만 떠올린다. 몸은 지수와 함께 있는데, 마음은 엄마를 향해 있다. 지수는 부모가 대학교수이다. 지수는 부모의 뜻을 따라 대안학교에 입학했지만 이런저런 공부 모임에 치인 삶을 살아왔다. 제도권 학교를 다닌 은진이나 대안학교를 다닌 지수나 인형이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는 얘기다. 일탈 또한 지수가 먼저 한 터였다. 한 해 전 지수가 서울로 찾아왔을 때, 은진은 시우와 약속이 있다는 이유로 지수를 만나지 않았다. ‘대안학교’에 붙은 ‘대안’이라는 말이 참 무색하다. 작가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제시하는 ‘대안’이라는 게 결국은 인형을 또 다른 인형으로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한다. 어떻게 하면 인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직접 만나면 된다.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일탈이 자유를 향한 첫걸음이 된 셈이다.
김선영이 지은 「바람의 독서법」에도 인형처럼 사는 아이들이 나온다. 주인공 강우는 학교 성적이 중위권이다. 집안에서도 학교에서도 별다른 관심을 받지 않는 학생이다. 강우 형은 어릴 때부터 영재로 소문난 아이였는데, 고등학교에 입학에서도 상위 4퍼센트 안에 든다. 강우 엄마는 어릴 때부터 형의 일상을 관리했다. 공부 시간, 친구를 사귀는 일에 이르기까지 엄마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고2 때까지 형은 엄마 계획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고3이 된 어느 날 형은 자기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엄마를 미워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거라는 말을 할 뿐, 다른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강우는 어릴 적 친구인 이현을 만나고 나서야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게 된다. 이현의 성당 언니가 중간고사를 망친 후 자살을 했는데, 그 언니가 형의 여자친구라는 얘기였다. 친구까지 관리한 엄마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일류 대학에 입학하면 모든 일이 좋아질 거라는 말로 엄마는 아들을 설득하려고 한 것일까? 아이를 자기 뜻대로만 다루려는 부모들의 생각이 결국은 형을 막다른 길로 내몬 것이다.
이 소설은 강우가 글을 정확히 읽는 뜻밖의 능력을 얻어 성적이 갑자기 오르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중간 정도에 머물던 성적이 갑작스레 오르자 학교 선생들과 엄마가 강우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선생들은 그 형에 그 동생이라며 강우를 칭찬하고, 엄마는 형에게서 얻지 못한 기쁨을 강우에게서 얻고 싶은 소망을 내보인다. 강우는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고 평범하게 살고 싶다. 하지만 새로이 생긴 능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람들 주목을 받게 된다. 모의고사 성적이 잘 나온 데 이어 중간고사 성적도 잘 나온다. ‘혹시나’ 하던 시선이 ‘역시나’로 바뀌면서 어른들은 강우를 압박하기 시작한다. 평범하게 살고 싶은 아이가 어떻게 어른들의 시선을 감당할 수 있을까? 기말고사를 보던 날 강우는 눈앞에서 현란하게 움직이는 글자들 때문에 속을 진정하기 힘들다. 토할 것만 같다. 자리에서 일어난 강우는 옥상으로 내달리기 시작한다. 옥상 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이마에 닿는다. 살 것 같다.
묘한 건, 강우의 갑작스런 행동을 바라보는 어른들과 친구들의 태도이다. 강우가 옥상으로 올라가자 사람들은 강우가 성적에 대한 압박감을 못 이기고 자살을 하려고 하는 거라고 판단한다. 물론 강우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 우리 사회가 내보이는 맨얼굴이다. 성적이 잘 나오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공부를 잘하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 공부 잘하는 아이가 일탈하면 어른들은 걱정하는 말부터 하지만, 공부 못하는 아이가 일탈하면 어른들은 어릴 때부터 싹수가 보인다는 악담부터 내뱉는다. 성적에 매인 아이들은 등수에 집착하게 되고, 한 등수라도 내려가면 세상이 무너질 듯 한탄한다. 인형으로 사는 아이들은 그만큼 부담감이 큰 것이다. 인형이란 게 어느 순간 사람들 관심 밖으로 내쫓길 신세에 있지 않은가? 평범하게 살고 싶은 강우의 소망은 사실 인형처럼 사는 아이들에게는 이룰 수 없는 꿈과도 같다. 어른들이 세운 나라에서 정작 아이들만 힘들어하는 꼴이라고나 할까?
유영민의 「약속」과 진저의 「소녀 블랙」은 학교와 사회에서 소외당하는 아이들을 묘사하고 있다. 이 소설들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가난하거나, 아니면 외모가 특이해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다. 「약속」에는 산동네에 사는 아이들이 나온다. 수연과 승미다. 주인공 수연의 별명은 짜장이고, 승미는 별명이 돼지이다. 짜장처럼 검은 수연과 살이 찐 승미는 아이들이 놀리면 놀리는 대로 그냥 받아들인다. 반응을 보이면 더 오랜 시간 놀림을 당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시선을 다른 아이들에게 적용한다.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산동네에 사는 아이들은 친구가 될 수 없다. ‘신분’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파트 사는 아이들이 모여 산동네에 사는 아이들을 더럽다고 놀린다. 수연처럼 엄마는 집을 나가고 아빠와 사는 아이는 더욱 그렇다. 아이들은 자기보다 못한 아이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경쟁 사회에서는 어떻게든 앞서 달려가야 한다. 끼리끼리 뭉치는 일이 아이들 세계에서 왜 일어나는 것일까? 끼리끼리 뭉치는 곳에 들어가야 그나마 경쟁에서 밀리지 않을 수 있어서이다.
「소녀 블랙」에 등장하는 지안은 ‘까만콩’이 별명이다. 키가 작고 살갗은 오븐에서 늦게 꺼내 타 버린 쿠키마냥 까맣다. “아이들은 엉덩이에 검정 꼬리표를 붙인 채 음산한 기운을 내뿜는 날 꺼렸다. 때론 옷이 더럽다고 손가락질하였다. 내가 다가갈수록, 나의 어둠에 물들까 봐 두려워하며 슬금슬금 뒷걸음쳤다.”(111쪽)에 나타나는 대로, 아이들은 지안을 자기들 바깥에 세워두려고만 한다. 어둠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이다. 아이들은 지안을 어둠 속으로 내몰아버린다. 그래야만 자기들이 어둠에 묻히지 않는다는 것일까? 스스로 ‘블랙’이라 지칭하며 어둠 속에 묻힌 지안 앞에 얼굴이 하얘 별명이 ‘알비노’인 호수가 나타난다. 한 사람은 검고, 한 사람은 하얗다. 검고 하얀 기호는 아이들에게는 낯선 기호이다. 아이들은 두 사람의 삶을 바깥으로 내몰고는 자기들의 세계를 구축한다. 사회적 차별의식이 그대로 학교로 옮겨진다. 블랙도 아니고 화이트도 아닌 아이들 사이에서 블랙으로, 화이트로 사는 삶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작가는 아이들에게 내몰린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다가서는 장면으로 소설을 맺는다. 낯선 기호는 낯선 기호와 더불어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일까? 낯섦을 낯섦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 현실이 씁쓸하기만 할 뿐이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