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블로그 전체검색
번외

[도서] 번외

박지리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애도와 우울 사이

- 박지리, 『번외』

 

 

 

학교 총격 사건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이가 있다. 학교 소풍을 가지 않은 아이들이 시청각실에 모여 영화를 본 직후 K가 학생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 선생님 1, 학생 18명이 사망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만 살아남았다. 쉬는 시간이 지나도 K가 들어오지 않자, 선생님이 주인공에게 K를 찾아오라고 한다. 총격 사건은 그러니까 주인공이 K를 찾아 나선 그 짧은 시간에 벌어진 셈이다. 학교에서 19명이 죽은 사건이니 사회적인 관심이 엄청날 수밖에 없다. 학교 교복만 보고도 사람들은 주인공이 다닌 학교에서 일어난 사건을 떠올린다. 호기심이다. 사건이 사건인지라 1년이 지난 후에도 사람들은 죽은 이들을 위해 사이렌을 울린다. 사이렌이 울리면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애도를 한다. 총격 사건을 겪지 않은 사람들은 3분 동안 진행된 애도의식을 통해 다시 일상으로 복귀한다. 죽은 이들을 위해 애도를 표했으니 죄의식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것일까?

 

작가는 총격 사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주인공의 내면을 따라간다. 주인공 K와 친구였다. 겉으로 표시를 하지는 않았지만 K를 좋은 친구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K는 주인공이 생각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이를테면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이 멀리 있는 매점까지 가서 뭔가를 먹는 것에 대해 K는 상당히 부정적이다. 저건 너무 살고 싶어 하는 것 같잖아. 창피하게.”(62)라는 말 속에 그 이유가 나와 있다. K는 죽고 싶을 때는 두려움 없이 죽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삶에 집착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K가 이러는 이유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나와 있지 않다. 아버지가 교수이고 어머니가 의사라는 가정환경이 이야기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K가 겪었을 트라우마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물론 추측은 할 수 있다. 지식인 부모들은 일반적으로 자식이 완전체가 되길 원한다. 부모가 설정한 이상에 자식을 끼워 맞추려고 한다는 얘기다.

    

, 그 영화? , 나도 봤어. 맞아. 꽤 괜찮았지. 끝나기 5분전까지는. 난 너무 놀랐어. 아니, 배신을 당했다고 해야 하나. 그 영화를 절대 그런 식으로 끝내서는 안 되는 거였어. 주인공은 죽었어야 해. 그게 옳아. 내가 주인공이 죽는 새로운 엔딩의 버전을 만들어 보내 주면 감독은 나한테 꽃이라도 선물할까? 절대 못 그럴 거야. 주인공을 죽이지도 못하는 평범한 감독에게 그런 아량이 있겠어? 아마 날 시기해서 부들부들 떨기만 하겠지. 머릿속으로 살인을 하면서. 하지만 감독이 정말 실행에 옮겨서 날 죽인다 해도 후회는 없어. 위대한 죽음이니까. 왜냐고? 그럼 넌 어떤 게 위대한 죽음 같은데? (50~51)

    

K는 예술을 위해 죽는 것을 위대한 죽음이라고 말한다. 기찻길에 떨어진 술주정뱅이를 죽이고 대신 죽거나, 부모가 자식 대신 죽은 일을 그는 위대한 죽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남을 위해 자기를 죽이는 행위에서 위대한 죽음을 본다. 이런 통념에 비한다면 예술을 위한 죽음은 빈자리가 참으로 많다. 빈자리가 많다는 건 사람들이 그 죽음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죽는 일에는 이미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사람들은 그래서 부담 없이 그 죽음을 칭송한다. 총격 사건으로 죽은 선생과 학생들을 사람들이 왜 사회적으로 기억하겠는가? 거기에는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통념이 있다. 사람이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된다는 통념 말이다. 그 통념에서 보면 살인자 K는 인간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에게만 관심을 보인다. K가 엄연히 살아있는데도 주인공을 유일한 생존자로 이야기한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정확히 나누는 사람들의 이 마음은 통념일까, 아닐까?

 

총격 사건에서 살아남은 주인공을 사람들은 거리를 두고 본다. 겉으로는 주인공 마음이 다칠까 염려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주인공과 섞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죽어야 할 사람이 살아난 것이 아닌가? 주인공은 이승과 저승에 걸쳐 있다. 이승에서 사는 사람들은 저승 가까이 갔다가 돌아온 주인공을 신기하게 바라본다. 그가 어떤 마음 상태일지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경찰은 사건의 상황만 파악하려고 하고, 정신과 의사는 자기 생각을 자꾸만 주인공에게 투영하려고 한다. 그나마 아이는 정신과 의사에게 동류의식을 느낀다. 자기 마음의 끝단이나마 발견했다는 의미이리라. 죽음의 자리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이유만으로 주인공은 혼자가 된다. 사람들이 기울이는 관심은 앞서 얘기했듯이 호기심에 가깝다. 죽은 이들을 향해 애도를 3분 안에 끝내는 사람들이 어떻게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의 마음을 알까?

 

병원 직원은 주인공에게 죽은 아이들 몫만큼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죽은 아이들 몫만큼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통념을 진실처럼 말한다. 통념은 통념일 뿐이다. 주인공은 도통 죽은 이들을 애도할 수 없다. 그들을 생각할수록, 그리고 그들을 죽인 K를 생각할수록 주인공은 애도는커녕 우울증 상태로 빠져든다. 애도나 우울증이나 슬픔에서 시작하는 건 맞다. 하지만 애도는 슬픔 속으로 깊이 빠져들지는 않는다. 애도하는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슬픔에서 빠져나와 일상생활을 한다. 하지만 우울증에 빠진 사람은 다르다. 시간이 흘러도 그는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당연히 일상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주인공은 틈만 나면 조퇴를 한다. 3인데도 공부를 제대로 하지도 않는다. 사는 게 그저 허망할 따름이다. 사는 게 허망하니 틈날 때마다 죽고 싶은 마음이 든다. K처럼 그는 자꾸만 사는 게 부끄럽기만 한 것이다.

 

K번외의 삶을 살았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삶을 산 그는 어쩌면 총격 사건을 영화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감독은 영화를 마음대로 만든다. 주인공을 죽이고 싶으면 죽일 수 있다는 얘기다. 번외에 있던 K가 감독이 되는 순간, 그는 영화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마음껏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시청각실에서 아이들은 K가 짜깁기한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보는 아이들이 곧 영화배우가 된 격이라고나 할까? 주인공이 이 사실을 깨달았는지는 정확히 나타나지 않는다. 주인공은 다만 도로로 흘러들어간 배구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다. 배구공은 거리낌 없이 도로로 뛰어들었다. 배구공은 주인공을 이리로 오라고 유혹한다. 죽음이 주인공을 향해 손짓을 한다. 작가는 주인공을 죽일까? 이리 보면 K는 이 글을 쓰는 작가와 참 많이 닮은 듯싶다. 주인공은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피해 자꾸만 죽음 가까이 가려고 한다. K가 만들려고 한 영화의 결말이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취소

댓글쓰기

저장
덧글 작성
0/1,000

댓글 수 0

댓글쓰기
첫 댓글을 작성해주세요.

PYBLOGWEB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