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영화(映畵)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숲을 이륙하는 흰 새 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영화관에서는 먼저 애국가가 울렸다.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하는 애국가가 커다란 배경 화면과 어울려 자리에서 일어난 관객들을 향해 울려 퍼졌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않는 사람은 눈총을 받았다. ‘애국가’라는 숭고한 노래가 울려 퍼지는데 일개 국민이 어떻게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군사문화가 지배하던 시기를 알려주는 이야기지만, ‘애국가’는 지금도 여전히 ‘태극기’와 함께 국가에 대한 맹세를 이끌어내는 권력을 지니고 있다. 애국가나 태극기 자체가 권력은 아닐 것이다. 그런 대상들을 통해 권위를 세우려는 사람들이 ‘권력’을 행세한다고 보는 게 정확하겠다. 지금도 야구장에 가면 경기가 시작되기 전 애국가가 먼저 울린다. 선수들과 관객들은 태극기가 걸린 외야를 향해 서서 가슴에 손을 얹고 경건한(?) 마음으로 애국가를 듣는다.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는 시인의 말이 21세기 현실에서도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시인은 애국가는 듣지 않고 화면에 나오는 “흰 새떼들”에 주목한다. 흰 새떼들은 일정한 무리를 이루며 갈대숲을 이륙하고 있다. 보금자리를 떠나 그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새들은 자기들이 가야할 곳으로 일제히 날개를 편다. 하늘은 드넓다. 저 드넓은 곳을 날개를 펴고 나는 마음은 과연 어떨까? 새가 되고 싶은 시인은 그러나 지금 영화관 구석에 처박혀 애국가를 듣고 있다. 구석에 박혀 파란 하늘을 나는 새떼를 부러운 눈으로 보고 있다.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새들은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새가 날아가는 곳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다. 새가 날아가는 곳이 이 세상 밖이라는 게 중요하다. 영화관처럼 비좁은 세계를 벗어나 드넓은 하늘을 날고 싶은 소망을 시인은 비상하는 새떼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하늘을 나는 저 흰 새떼를 스크린으로 보며 시인은 영화관 한 구석에서 세상 밖으로 나아가는 상상을 한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라는 시구에 나타난 대로, 시인은 일부러 과장된 몸짓을 내보인다. 이래저래 해도 영화관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 하지만 몸은 구속되어 있어도 정신은 그럴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래, 시인은 우리들끼리 대열을 이루어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 꿈을 낄낄대고 깔쭉대며 표현한다. 새들도 날아간 세상을 우리 인간이, 이성을 지닌 인간이 못 갈 이유가 무엇인가? ‘가야 한다’는 당위는 ‘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바뀐다. 엉덩이를 들썩일 정도로 희망이 부푼다. 그러나 이내 시인은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라는 애국가 끝자락을 듣는다. 애국가가 끝나면 자리에 앉아야 한다. 영화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왔으니 사람들은 “각기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라는 제목으로 시인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1980년대라는 타락한 시대 속에서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꿈을 꾸었다. 민주화를 향한 열망으로 똘똘 뭉친 이들이 6월 항쟁을 일으켰고, 그 결과 대통령 직선제라는 결과물을 낳았다. 6월 항쟁은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 아니다. 가깝게는 박종철, 이한열이라는 열사들이 있었고, 멀게는 군사문화의 폭압 아래서도 하늘을 나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황지우가 쓴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는 이 세상을 뜨는 새를 보며 민주화의 꿈을 꾸었던 사람들의 내면을 에둘러 보여준다. 꿈을 꾼다고 그 꿈이 현실에서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당장 이 시에서 시인은 애국가가 끝나고 이내 의자에 주저앉는 존재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꿈을 꾸었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로 해서 혹독한 대가를 받았다. 흰 새떼들이 자유롭게 하늘을 날 때 민주화를 외치던 누군가는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홀로 앉아 추위와 싸워야 했다. 누구보다 편하게 세상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차가운 골방이 아니라 훈훈한 사무실에서 펜대나 굴리며 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그들은 하늘 아래 광장으로 나섰고 그곳에서 민주주의를 목 놓아 외쳤다. 새들만 하늘을 날란 법이 있는가? 인간도 하늘을 날며 제 꿈을 펼칠 수 있지 않은가? 한 사람이 꾸던 꿈이 시간이 지나 모든 사람이 꾸는 꿈으로 바뀌면 현실 또한 이에 따라 바뀔 수밖에 없다. ‘국민’이라는 이름에 새겨진 거대한 힘은 바로 이 꿈을 통해 현실에서 펼쳐지는 셈이다.
2016년에 불길처럼 번진 촛불집회로 전임 대통령을 탄핵한 국민의 힘은 무엇보다 새로운 세계를 꿈꾼 이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꿈을 꾸는 사람은 또 다른 꿈을 꾸는 사람과 끝없이 이어진다. 예전부터 꿈꾸던 민주화가 시나브로 실현되는 과정을 거치며 사람들은 더불어 꿈을 꾸는 마음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은 힘이 약하다. 하지만 그 약한 힘이 모이지 않으면 촛불 집회의 거대한 힘은 나올 수 없다. 탄식으로 끝나는 이 시에서 나는 역설적으로 그 밑에 스민 이 거대한 힘을 본다. 꿈이 있는 자에게는 여전히 희망이 살아 있다. 그 희망으로 탄식하던 우리들은 지금에 이르렀다. 죄를 지은 대통령들을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처벌하는 사회를 만들었다. 이게 역사다. 역사는 언제나 꿈을 꾸는 사람들을 중심에 내세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