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노 디카시 「길의 꿈」

기린 무늬 길이다. 기린이 되고 싶은 길이다.
아프리카로 초원으로 뻗어가고 싶은 길이다.
- 김왕노, 「길의 꿈」
제2회 디카시작품상을 수상한 김왕노의 「길의 꿈」은 디카시가 지향하는 길을 예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진이미지는 특별하지 않다. 우리가 일상에서 보는 돌길이다. 길에 깔린 돌 모양이 기린 무늬를 떠올리게 하는 것 정도가 이채롭다면 이채롭다. 시인은 일상에서 흔히 보는 이 이미지로 한 편의 디카시를 만들어내고 있다. 시인은 일상을 일반인들과는 다른 눈으로 보기 때문이다. “기린 무늬 길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시에서 시인은 제목처럼 ‘길의 꿈’을 노래한다. 길은 무엇을 꿈꾸고 있을까? “기린이 되고 싶은 길이다.”에 그 꿈의 내용이 담겨 있다. 길은 무생물이다. 무생물인 길이 기린이라는 생물이 되고 싶어 한다. 특별하지 않은 일상에서 특별함을 보는 시인의 눈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기린 무늬를 가진 길은 기린을 꿈꾼다. 그리고 길은 기린이 된다. 꿈꾸는 일만으로 기린이 된다고? 그렇다. 꿈꾸는 일만으로 길은 기린이 된다. 상상이 곧 현실이 되는 세계를 시인은 디카시 양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시인은 기린 무늬 길을 보고 기린을 상상한다. 기린 무늬 길은 시인을 따라 기린을 상상한다. 길이 원하는 소망을 시인을 상상으로 통해 이룬다. 상상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미지로 표현한다. “기린 무늬 길”이라는 ‘날시’(사진으로 찍기 이전에 시인이 현실에서 본 사물 이미지)를 보는 순간 시인은 기린이 되고 싶은 길의 욕망을 발견한다. 길이라고 해서 꿈을 꾸지 않을 리 없다. 일상 언어로는 그 꿈을 표현할 수 없지만 사물의 언어라면, 다시 말해 길의 언어라면 충분히 그 꿈을 표현할 수 있다.
기린 무늬 길은 기린이 되어 “아프리카 초원으로” 뻗어간다. 시인은 “뻗어가고 싶은 길이다.”라고 쓰고 있지만, 시에서는 뻗어가고 싶은 길이 곧바로 뻗어가는 길이 되어버린다. 길이 꾸는 꿈은 상상의 공간 속에서 어김없이 이루어진다. 상상이 현실이 되는 이 공간을 시인은 사진이미지와 언어 표현을 결합하여 구현하고 있다. 이 시는 사진이미지만으로 시가 되기 힘들다. 마찬가지로 언어 표현만으로도 시가 되기는 힘들다. 사진이미지가 언어 표현으로 흘러가는 자리, 정확히 말하면 사진이미지가 언어 표현과 맞물리는 자리에서 이 시는 비로소 ‘디카시’가 된다.
디카시작품상 심사위원들은 “어디에나 있는 산책길의 풍경에서 일약 아프리카 대초원으로 전개되는 감각의 생동감을 내재화함으로써, 불확정적인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로 하여금 강한 생명력과 정신의 자유를 꿈꾸게 했다.”는 말로 이 시의 가치를 평가하고 있다. 말이 많다고 의미가 풍부해지는 것은 아니다. 의미는 사물의 핵심을 제대로 건드릴 때 수없이 많은 갈래로 뻗어나간다. 이미지들은 끊임없이 우리 주변을 떠돌고 있다. 디카시(인)는 그런 이미지들을 순간적으로 포착해 사진이미지와 문자로 표현한다. 시가 일상으로 이어지는 자리를 김왕노의 위 시는 확연히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