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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찬호 디카시 「비상」

 

    

    

 

  오래된 꿈이여

  호두나무 고사목이 된 오래된 꿈이여

  날자꾸나 한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 송찬호, 「비상」

 

 

새를 닮은 고목나무가 사진이미지로 제시되어 있다. 고목나무는 죽은 나무이다. 나무는 죽어 왜 를 남겼을까? 사진이미지를 보면 고목나무는 솟대같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 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 뿌리는 땅에 박혀 있다. 하늘을 날고 싶은 새=나무에게 뿌리는 벗어날 수 없는 한계지점을 나타낸다. 뿌리에서 벗어나야 하늘을 날 수 있지만, 뿌리에서 벗어나면 나무는 더 이상 생명이 아니게 된다. 이미 죽은 나무라고? 그래도 마찬가지다. 나무는 땅에 뿌리를 박고 하늘을 갈망한다. 그만큼 나무는 간절하게 새가 되기를 소망할 수밖에 없다. 새가 되는 일은 나무에게 자기 존재를 버리는 일과 다르지 않다. 나무는 새가 되어 다른 세계로 나아가려고 한다. “오래된 꿈이여라는 시구에 새가 되고 싶은 나무의 간절한 꿈이 내포되어 있다.

 

시인은 오래된 꿈이라는 시구를 반복해서 쓰고 있다. 나무는 오래된 꿈을 품고 호두나무 고사목이 되었다. 고사목은 여전히 희망을 품고 있다. 죽었지만 살아있는 나무라는 역설로 나무는 오랫동안 꿈꾸었던 일을 이루려고 한다. 그 꿈이 실현될지 여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이미 죽은 나무가 아닌가? 죽음을 넘어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순간 나무는 새가 되는 상상 속으로 기꺼이 스며든다. 꿈은 현실과 상상의 경계에 있다. 동그란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나무=새는 땅에 자기 뿌리를 박고 있다. 흰구름이 떠다니는 하늘로 가려면 나무는 자기가 뿌리박은 세계 밖을 상상할 줄 알아야 한다. 상상이 현실을 이끈다. 상상이 꿈을 현실로 만든다. 시인이 호두나무 고사목을 본 순간 나무는 새가 되어 하늘을 난다.

 

물론 나무새가 하늘을 나는 꿈은 상상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시인은 다만 그 상상을 언어로 표현할 뿐이다. 시 언어를 왜 일상 언어와 다른 차원에 두겠는가? 시 언어는 일상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세계를 이미지로 구현한다. 호두나무 고사목이 다시 살아나 새가 되는 순간을 시인은 언어로 직관한다. 시인이 쓰는 언어는 직관과 이어져 있다. 직관은 일순간에 펼쳐지는 이미지를 가리킨다. “날자꾸나 한번만 날아보자꾸나라는 문장은 이성으로 귀결되지 않는 감각의 영역을 함축하고 있다. “한번만 더라는 시구에 암시된 대로 호두나무는 이미 하늘을 나는 새였다. 하늘을 나는 새가 호두나무였다고 말해도 상관없다. 나무는 나무고 새는 새라고 생각하는 일 자체가 상상 속에서는 무의미한 일이 아니던가.

 

나무가 된 새는 혹은 새가 된 나무는 한 번 더 하늘을 나는 꿈에 부풀어 있다. ‘비상이라는 제목으로 시인은 죽음()이 생(죽음)으로 확장되는 어떤 순간을 담고 있다. 삶과 죽음만큼 우리를 웃기고 울리는 일이 있을까? 땅에 뿌리를 내린 채 하늘을 향해 날개를 펴는 나무새의 꿈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저마다의 인생을 꾸리는 우리네 꿈과 정확히 닮아 있다. 생명이 있는 누구나 고사목이 된다. 고사목이 되는 건 자연이니 슬퍼할 까닭이 없다는 얘기다. 중요한 것은 고사목이 되어야 오래된 꿈을 비로소 실현할 수 있다는 대목이다. 묘하지 않은가? 죽어서 이를 수 있는 세계가 있다는 것이. 시인은 죽은 나무에서 날고 싶은 희망=삶을 본다. 죽음에 다가갈수록 더욱 더 간절해지는 그 꿈은 그래서 한없이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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