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기 디카시 「돌멩이의 기도」

배를 움켜쥐고
까르르르르 깔 깔 깔 깔 깔
굴러요
내 심장이 뛸 때까지
내 쓸개와 간이 웃을 때까지
- 박영기, 「돌멩이의 기도」
돌멩이가 사진이미지로 제시되어 있다. 반질반질 윤이 난다. 이 사진이미지로 시인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돌멩이의 기도’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돌멩이는 어떤 기도를 할까? 무생물이니 생명을 달라는 기도를 할까? “배를 움켜쥐고/ 까르르르르 깔 깔 깔 깔 깔” 구르는 돌멩이를 시인은 상상한다. 돌멩이는 웃으면 지상을 구른다. 배를 움켜쥘 정도로 한바탕 웃어젖히는 돌멩이를 떠올려 보라. 사진이미지와 달라 보이지 않는가? 사진이미지에 나오는 돌멩이는 무언가 근엄해 보인다. ‘근엄’이라는 말이 못마땅하면 ‘침묵’이라는 말로 돌려 써 보자. 굳게 입(돌은 어디에 입이 있을까?)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는 돌멩이는 익숙한 비유이다. 돌멩이를 보고 웃음을 느끼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시인은 침묵하는 돌멩이에게서 웃음을 발견한다. 겉으로는 침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돌멩이의 내면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열정으로 들끓고 있다.
그 열정이 까르르르르 웃음으로 터져 나온다. 웃지 않다가 웃으니 얼마나 배가 울릴까? 깜짝 놀란 배를 움켜쥐고(자기 배를 움켜쥔 돌멩이 모습이 떠오르는가?) 돌멩이는 웃는다. 돌멩이는 이렇게 웃고 싶었는지 모른다. “내 심장이 뛸 때까지” 웃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왜 돌멩이는 지금까지 침묵을 지킨 것일까? 돌멩이를 보는 우리 때문이다. 돌멩이가 내보이는 모습만 보고 우리는 돌멩이를 침묵하는 존재로 평가했다. 돌멩이가 감추고 있는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고 어떻게 돌멩이라는 사물에 다가갈 수 있을까? 돌멩이는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숨겨왔다. 심장이 생겨날 때까지 웃고 싶은 욕망을 숨겨왔다. 돌멩이의 웃음은 돌멩이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존재에게만 들린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돌멩이를 보는 사람의 몸과 마음이 열려야 돌멩이의 몸과 마음도 열린다.
시인은 배를 움켜쥐고 웃는 돌멩이를 상상하고 있다. 상상은 현실을 뒤바꾼다. 상상은 현실과 반대편에 있는 게 아니라 현실과 더불어 있다. 돌멩이가 웃는 모습을 상상하면 정말로 돌멩이가 웃는다. 상상이 현실이 된다. 사진이미지로 제시된 돌멩이를 다시 보라. 무엇이 보이는가? 웃고 있는 돌멩이가 보이는가? 깔깔 웃는 돌멩이인가, 아니면 은근한 미소를 짓는 돌멩이인가? 시인은 “내 쓸개와 간이 웃을 때까지” 열렬하게 기도하는 돌멩이를 사진이미지로 제시한다. 돌려 말하면 시인은 돌멩이를 보는 순간 웃고 있는 돌멩이를 상상한 것이다. 사진이미지에는 순간을 직관하는 시인의 모습이 내포되어 있다. 그 직관이 사진이미지와 어울려 언어로 표현될 때 한 편의 디카시가 탄생한다. 사진이미지 속 돌멩이는 지금 웃고 있다. 상상이 현실이 되는 어떤 순간을 시인은 돌멩이라는 시적 대상으로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