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균 디카시 「지렁이」

온기를 쫓아 기어든 말랑말랑한 몸들이
그 온기에 말라 왜곡되면서
콘크리트 층층의 행간에 문장을 남겼다
생의 출구를 향해 머리와 허리가 그은 획을
빛과 바람이 완독하리라
- 최석균, 「지렁이」
비가 그치고 햇빛이 땅을 말리고 있는 중일까? 땅속에 있어야 할 지렁이들이 땅 위로 나와 꿈틀대고 있다. 지렁이들 몸에 있는 수분이 햇빛을 받아 점점 말라간다. 땅 위에 죽음이 펼쳐지고 있다. 시인은 이런 사진이미지로 무엇을 얘기하려고 하는 걸까? 시인은 “콘크리트 층층의 행간에” 새겨진 문장을 본다. 온기를 쫓아 땅 위로 올라온 “말랑말랑한 몸들이/ 그 온기에 말라 왜곡”되는 장면을 본다. 살기 위해 올라온 곳이 죽음의 땅으로 변해버렸다. 삶이 순식간에 죽음으로 뒤바뀐다. 온기에 마른 지렁이가 남긴 문장에는 따라서 죽음에 얽힌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말 그대로 죽음이 새겨진 문장을 남기고 지렁이는 땅 위에서 점점이 말라간다.
햇빛에 수분을 빼앗기는 와중에도 지렁이는 끊임없이 꿈틀댄다. 생명이 있는 모든 사물은 가만히 있으려고 하지 않는다. 여기저기로 계속해서 움직인다. 움직여야 산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움직임으로 자기가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시인은 콘크리트 층층에 남은 지렁이의 문장을 “생의 출구를 향해 머리와 허리가 그은 획”으로 풀이한다. 생명은 살기 위해 움직인다. 죽으려고 움직이는 생명을 본 적이 있는가? 생의 출구를 향한 지렁이의 간절한 몸짓이 하나하나 콘크리트 층층에 기록된다. “머리와 허리가 그은 획”으로 지렁이는 살고 싶은 본능을 표현한다. 생(生)은 무엇보다 본능으로 나타난다. 감각이라는 말로 이 본능을 설명하면 어떨까? 불에 몸이 닿으면 우리는 감각적으로 움찔한다. 누구나 그렇다. 생명은 움직임으로 자기의 본능을 드러내는 셈이다.
시인은 지렁이가 내보이는 마지막 삶을 “빛과 바람이 완독”하는 장면으로 시를 맺는다. 햇빛이 있고, 빛이 있고, 바람이 있다. 지렁이는 꿈틀거림으로 생에 대한 간절한 욕망을 표출한다. 햇빛은 햇빛대로 일을 하고, 바람은 바람대로 일을 한다. 햇빛과 바람이 수행하는 자연이 지렁이를 죽음으로 내몬다. 하긴 죽음은 지렁이에게도 어김없이 자연이다. 햇빛에 몸이 마르는 건 지렁이로 태어난 생명의 운명=자연이다.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 지렁이의 생을 규정한다. 시인은 지렁이에게 내재된 이 운명에 왜 ‘완독’이라는 말을 붙이고 있는 것일까?
‘완독’은 지렁이가 다른 사물들과 맺는 관계를 가리킨다. 삶이 관계로 유지되듯 죽음 또한 관계로 펼쳐진다. 땅 위에서 죽어가는 지렁이 몸으로 햇빛이 비치고 바람이 불어온다. 그 상황을 지렁이의 쓸쓸함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도 지렁이는 쓸쓸하지 않다. 그게 자연이다. 저마다의 생명들은 저마다의 생명들을 완독하는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자연 속에서 하나가 되는 풍경을 연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