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주 디카시 「알바생」

언제부터 사람을
톡 뽑아 쓰고 버리고
톡 뽑아 쓰고 버리고
- 김영주, 「알바생」
디카시는 일상에서 느끼는 깨달음을 사진이미지와 언어로 표현한다. 사물이나 상황을 보고 ‘순간적으로’ 느끼는 정서를 언어로 표현하는 방식은 기존의 시에서도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기존 시 양식은 이미지를 언어로 드러내야 하기에 디카시보다는 많은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이미지를 언어로 표현하다 보니 자연스레 시 언어는 일상 언어의 맥락을 넘어 난해해지기 마련이다. 시인과 독자를 가르는 틈은 사실 시 언어에 내재된 이러한 난해함에서 발생한다. 물론 디카시 양식이라고 해서 시 언어가 지닌 난해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건 아니다. 다만 디카시는 사진이미지를 제시함으로써 시 언어를 우리가 사는 일상으로 끌고 내려오는 장점이 있다. 김영주가 지은 ?알바생?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이 시에서 시인은 디카시가 아주 사소한 일상에서 시작되는 문학양식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알바생’이라는 제목 아래 책상 위에 화장지가 놓인 사진이미지가 보인다. 개인 서재일 수도 있고, 사무실일 수도 있다. 시인은 아주 일상적인 공간에서 시로 표현할 만한 무언가를 본다. 화장지와 ‘알바생’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언어로 표현된 부분으로 눈길을 돌린다. “언제부터 사람을/ 톡 뽑아 쓰고 버리고”라는 구절에 드러난 대로 시인은 사람을 화장지처럼 취급하는 세태를 비판하고 있다. 쓰임새가 없는 화장지는 곧바로 버려진다. 이미 사용한 화장지를 버리지 않으면 책상 위가 지저분해진다. 사용한 화장지를 버린다고 해서 뭐라 할 사람도 없다. 당연한 일을 한다는 듯 칭찬까지 건네는 사람도 있다. 주변이 산뜻해지지 않았는가. 톡 뽑아 쓰면 이내 버려지는 화장지라는 대상으로 시인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원리를 본다. 자본주의를 지배하는 원리라고?
자본주의는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들을 중시한다. 이익이 되면 친구가 되고 이익이 되지 않으면 적군이 된다. 친구와 적군이 뚜렷이 구별되어 있으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말 그대로 전쟁이 벌어진다. 개인과 개인이 벌이는 전쟁이든, 국가와 국가가 벌이는 전쟁이든 그 밑바탕에는 무한경쟁의 논리가 있다. 상대를 밟고 일어서야 내가 산다. 더불어 사는 세계를 자본주의는 인정하지 않는다. 톡 뽑아 쓴 건 버려야 새로운 걸 톡 뽑아 쓸 수 있다. 생산은 무한생산으로 이어지고 소비는 무한소비로 이어진다. 생산하기 위해 소비하고, 소비하기 위해 또 생산한다. 생산이 곧 소비가 되는 사회는 화장지든 알바생이든 일회용으로 취급한다. 일회용만큼 생산 속도가 무한대인 물건들이 어디에 있겠는가?
사진이미지에는 아직 사용되지 않은 화장지가 보인다. 빨리 사용하라고 우리를 유혹하는 것 같다. 화장지를 사용하면 다른 화장지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화장지는 끊임없이 생산된다. 그러니 화장지는 끊임없이 소비되어야 한다. 사소한 일상 속에서도 우리는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이 무거운 몸을 움직인다. 우리는 무언가를 생산하기 위해 무언가를 소비한다. 물건만 소비하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도 아낌없이 소비한다. 오죽하면 죽을 정도로 자기 몸을 혹사시키는 ‘소진消盡’이라는 말이 후기자본주의 사회를 대변하는 용어가 되었겠는가? 시 제목은 ‘알바생’이지만 ‘대기업 사원’으로 제목을 바꿔도 달라질 건 없다. 자본에게 인간은 돈을 버는 도구일 뿐이다. 사진이미지를 다시 본다. 하얀 얼굴을 한 도구=인간이 보인다. “톡 뽑아 쓰고 버리고”라는 시구에 표현되는 상황을 한 번 더 음미해 보라. 누가 보이는가? 거기서 자기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자본주의 사회가 돌아가는 원리를 정말로 모르는 바보거나, 아니면 눈을 감고 애써 진실을 외면하는 거짓말쟁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