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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손민규 역
태일출판사 | 1999년 12월

 

 

 

 

그렇다면 어떻게 지식을 부정할 것인가? 하나의 지식을 부정하기 위해 다른 지식을 끌여들여서는 안 된다. 다만 지식이 단절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깊이 들여다보라. 이 사실을 강렬하고 총체적으로 주시하라. 이것만으로 충분하다. 다른 지식으로 대체해서는 안 된다.

이 강렬한 주시는 불이다. 이 강렬함이 그대의 지식을 태워 재로 만들 것이다. 이 강렬함만으로 충분하다. 이 강렬함이 바로 통찰(insight)’이라고 알려진 것이다. 이 통찰은 그대의 지식을 태워버릴 것이며, 그 지식은 다른 지식으로 대체되지 않을 것이다. 이때, 거기에 공()이 있다. 수냐타(shunyata)가 있다. 거기에 무()가 있다. 왜냐하면 아무 내용물도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오염되지 않고 왜곡되지 않은 진리가 있다. (96)

 

텅 빈 마음은 순수한 현존(pure presence)이다. 이 순수한 현존 안에서 모든 일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존재계 전체가 이 순수 현존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이 나무들은 순수 현존으로부터 나왔다. 저 별들도 이 순수 현존으로부터 나왔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도, 모든 붓다들이 나온 것도 순수 현존으로부터이다. 이 순수 현존 안에서 그대는 신이다. 그러나 내면의 순수 공간이 무엇인가에 점유될 때 그대는 타락한다. 이때 그대는 에덴의 동산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다. 아무것에도 점유되지 않았을 때 그대는 다시 에덴 동산으로 돌아온다. 본래의 집으로 돌아온다.

마음이 실체에 의해, 사물에 의해, 사념에 의해 점유되지 않았을 때, 이때 여여(如如)이 있다. 이 여여함이 진리이다. 오직 공() 안에서만 진리를 만날 수 있다. () 안에서 그대는 진리를 향해 녹아든다. 그대의 문이 진리를 향해 열리고, 진리가 그대 안으로 들어온다. 오직 공() 안에서만 그대는 진리를 잉태할 수 있다.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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