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블로그 전체검색
말랑말랑한 힘

[도서] 말랑말랑한 힘

함민복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경계

 

 

 

  늦게 일어나 수돗가에 나가 보니

  고무대야에 피라미와 붕어가 떠 있다

 

  죽음을 머리 위에 허옇게 인

  잉어가 아가미를 움직인다

 

  그늘 흔드는

  지느러미

 

  두려웠나 물 밖으로 뛰쳐나와

  죽음 속으로 헤엄쳐 간 잔 고기 몇 마리

 

  부패와 호흡이 한 물 속이고

  심장들은 제자리뜀으로 경계를 넘는다

  - 함민복, 「낚시 이후」

 

 

경계는 이쪽과 저쪽의 사이에 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려면 경계를 넘어야 한다. 이쪽은 삶이 이루어지는 곳이고, 저쪽은 삶이 끝나는 곳이다. 삶이 끝나면 무엇이 남을까? ‘죽음이라는 말로 우리는 삶 너머를 이야기한다. 경계를 넘으면 정말로 우리는 죽음에 이르는 것일까? 전날 밤 낚시를 한 시인은 늦잠을 자고 일어나 수돗가로 나간다. 피라미와 붕어가 고무대야에 떠 있다. 고무대야보다 한참이나 넓었을 물속을 자유로이 노닐던 물고기들이다. 저들은 고무대야가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경계에 있다는 것을 알까? 죽음을 머리 위에 허옇게 이고 잉어가 아가미를 움직이는 걸 시인은 물끄러미 보고 있다. 아직은 살아 있는 잉어는 살아 있기에 아가미를 계속해서 움직인다. 죽음이 그늘진 고무대야에서 본능적으로 아가미를 움직이는 잉어를 보다가 시인은 문득 그늘 흔드는/ 지느러미에 눈길을 멈춘다. 죽음이 만든 그늘일까?

 

고무대야 주변에 물 밖으로 뛰쳐나온 물고기들이 보인다. 물속에서 살아야 할 물고기들은 왜 물 밖으로 뛰쳐나온 것일까? 물이 담긴 고무대야가 죽음의 장소라는 걸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아챈 것일까? 죽음이 두려워 물고기들은 죽음 속으로 헤엄쳐 간것일까? 물고기들은 살기 위해 물 밖으로 뛰쳐나갔을 것이다. 고무대야 밖에는 물이 없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물고기들은 고무대야를 벗어나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려면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 경계 안에 갇혀 있으면 새로운 세계는 언제나 저 멀리로 물러날 따름이다. 어떤 물고기들은 고무대야를 채운 물속에서 죽음을 머리에 인 채 숨을 쉬지만, 어떤 물고기들은 고무대야 바깥을 상상하며 기꺼이 제자리뜀을 뛰었다. 온몸에 힘을 모아 힘차게 공중으로 솟구쳐 오른 물고기의 눈에는 어떤 세상이 보였을까? 물기 하나 없는 시멘트 바닥에 몸을 부딪친 물고기는 물이 없는 세상에서 흐느적대다 서서히 죽어갔을 것이다.

 

죽음 속으로 헤엄쳐 간 잔 고기 몇 마리라는 시구로 시인은 이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살기 위해 바깥으로 도약한 물고기들은 그 결과로 목숨을 잃었다. 고무대야의 바깥이 죽음과 이어져 있다면, 고무대야의 안은 어떨까? 경계를 넘지 않았으면 물고기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고무대야에 있든, 그 밖에 있든 물고기들은 이미 죽은 존재나 마찬가지다. 고무대야에 떠 있는 물고기들은 죽음이 유예된 존재들일 따름이다. 강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 물고기들이 살아날 방법은 전혀 없다고 봐도 좋다. 시인은 부패와 호흡이 한 물 속이라고 쓰고 있다. 고무대야 안에서 숨을 쉬는 물고기들도 시간이 흐르면 부패될 수밖에 없다. 고무대야 바깥으로 나가나, 고무대야 안에서 간신히 목숨을 보전하고 있으나 물고기들은 어김없이 죽음으로 향한 길에 들어서야 한다. 다만 살아 있는 심장이 끊임없이 제자리뜀을 하며 다른 세상으로 가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고무대야 안에 갇힌 물고기는 온통 물로 뒤덮인 드넓은 강을 상상하며 제자리뜀을 했을 것이다. 어항에 익숙한 금붕어들은 바깥을 갈망하지 않는다. 바깥을 경험한 물고기만이 바깥을 갈망한다. 시인은 낚시 이후에 펼쳐지는 물고기들의 삶과 죽음을 엿보며 물고기와 다르지 않은 우리네 삶을 시화한다. 우리는 고무대야라는 작은 세상을 큰 세상으로 상상하며 살고 있다. 한 발만 뛰어올라도 고무대야 밖에 드리워진 세상이 보이지만, 우리는 애써 고무대야 안에 틀어박혀 간신히 호흡을 하며 살고 있다. 고무대야 밖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는다. 간혹 제자리뜀으로 경계를 넘는 존재들이 있지만 그 이후로 그들을 본 사람은 전혀 없다.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밖을 모르는 법이다. 안에서 밖으로 나가려는 마음을 품으면 주체하기 힘든 두려움이 온몸을 감싼다. 애초부터 우리는 바깥에 대한 두려움을 운명처럼 마음에 품고 태어난지도 모르는 것이다.

 

낚시 이후가 있으면 낚시 이전이 있는 법이다. 낚시 이전에 물고기들은 고무대야보다 넓은 강에서 마음껏 몸을 내저었을 것이다. 강 밖으로 강제로 끌려나온 물고기들은 강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이전과 이후라는 시간은 어찌 보면 이쪽과 저쪽을 가로지르는 한 순간을 가리키는지도 모른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내닫는 순간 이전은 곧바로 이후로 변해버린다. 이쪽과 저쪽을 우리는 나누어 생각하지만, 이쪽에는 이미 저쪽이 개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리 보면 강과 고무대야와 시멘트 바닥은 하나면서 여럿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삶은 삶이면서 동시에 죽음이라는 얘기. 강에 사는 물고기들도 제자리뜀으로 경계를 넘는 일을 수시로 반복한다. 제자리뜀을 뛰어야 경계 너머를 볼 수 있다. 바깥에 죽음이 넘쳐날지라도 심장은 끊임없이 제자리뜀을 요구한다. 저쪽을 보는 마음이 있어야 비로소 이쪽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미는 언제나 일이 끝난 후에야 밝혀지는 것이다.

    

 

 
취소

댓글쓰기

저장
덧글 작성
0/1,000

댓글 수 0

댓글쓰기
첫 댓글을 작성해주세요.

PYBLOGWEB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