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영 디카시 「공룡발자국 화석」

멀리서 온 기억에 발을 넣고
먼 곳의 기억에게로 걸어가 본다
먼 곳의 파도 소리, 먼 곳의
바람 소리, 쿵쿵쿵 발소리 내며
떠나가 버린 먼 곳의 사람에게로
- 박서영, 「공룡발자국 화석」
6천 5백만 년 전만 해도 지구에는 공룡이 있었다. 몸이 큰 짐승의 비애로 공룡은 지금 지구상에서 사라졌지만, 그 화석은 남아 공룡이 산 흔적을 보여준다. 공룡은 그러니까 인간으로 보면 태초의 기억과도 같은 것이다. 인간과 더불어 산 시대가 없는데도 우리는 공룡 앞에 선 인간을 자꾸만 상상한다. 흔적은 보이지 않는 대상을 상상하게 만드는 묘한 특성이 있다. 시인이 사진이미지로 제시한 공룡발자국 화석을 보며 우리는 지금이 사라진 공룡을 상상한다. 바위 위에 새겨진 저 흔적이 우리를 머나먼 세계로 데려간다. “멀리서 온 기억에 발을 넣고” 시인은 “먼 곳의 기억에게로” 걸어간다. 기억은 구체적인 이미지를 동반한다. 공룡발자국 화석이라는 이미지로 우리는 먼 곳을 향해 떠난다. 몸은 이곳에 있지만 마음은 저곳에 있다. 이곳과 저곳을 하나로 잇는 흔적이 참 흥미롭지 않은가? 공룡은 무심결에 바위에 새긴 흔적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한다. 헤아리기 힘든 시간이 지난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이 흔적을 보고 실체를 상상하는 즐거움에 빠진다.
먼 곳에서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바람 소리도 들려온다. 쿵쿵쿵 발소리를 내며 어딘가로 내닫는 공룡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물론 상상이다. 상상은 우리를 현실 바깥으로 이끌고 간다. 여기에 없는 공룡을 여기로 불러내는 힘이 상상에는 있다. 돌려 말하면 상상에 빠진 존재는 사물들이 내보이는 경계를 허문다. 경계를 세우면 상상은 한계에 갇힌다. 한계에 갇힌 상상을 상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상상 속에서는 인간과 공룡이 함께 산다. 상상하는 사람은 공룡이 되어 먼 곳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바람을 느끼며 공룡이 살았던 그 시절을 느끼기도 한다. 어린아이들이 왜 공룡을 좋아하겠는가? 아이들은 의미에 갇혀 있지 않다. 공룡을 그 자체로 본다는 얘기다. 시인 또한 다르지 않다. 공룡발자국 화석을 보며 시인은 온전하게 공룡을 느낀다. 화석을 보는 순간 공룡은 이미 이곳에 와 있다.
시인은 “떠나가 버린 먼 곳의 사람에게로” 가는 길에 공룡발자국 화석을 배치하고 있다. “먼 곳의 사람”이라고 시인은 말하지만, 굳이 ‘사람’이라는 대상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 먼 곳에 있는 사람은 떠나간 사람일 수도 있고, 죽은 사람일 수도 있다. 먼 곳은 달리 말하면 저곳=저승의 의미를 내포한다. 수천만 년을 거슬러 온 공룡발자국 화석을 보며 시인은 인간의 시선으로는 다가가기 힘든 어떤 세계를 떠올린다. 생명은 또 다른 생명으로 이어진다. 생명과 생명을 잇는 고리는 인연 줄이 되어 우리 마음에도 어김없이 새겨져 있다. 먼 곳을 향한 열정은 이리 보면 우리가 떠나온 원초적 세계를 그리워하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저곳이라고 해도 좋고, 저승이라고 해도 좋다. 죽음이 아니라면 어떻게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겠는가? 지금은 화석으로 남은 이 먼 곳의 흔적을 보며 시인은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로 그녀는 “떠나가 버린 먼 곳의 사람에게로” 가는 길을 연다. 자기이면서 자기가 아니고,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먼 곳의 사람. 거추장스런 육체를 버리고 저세상으로 삶터를 옮긴 시인은 과연 그곳에서 그 ‘사람 아닌 사람’을 만났을까? 대답이 없는 질문만 훌쩍 던져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