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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뫼비우스의 띠/장마/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외

[도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뫼비우스의 띠/장마/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외

조세희,윤흥길 등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조세희,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난쟁이 아버지

 

난쟁이 아버지가 있다. 다섯 식구의 가장인 아버지.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도 천국을 생각해보지 않은 날이 없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겨웠기 때문이다.”(31)에 나타나는 대로, 난쟁이 가족은 지옥과도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가난한 자를 인정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는 부자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왜냐고?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돈이기 때문이다.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돈이 없으면 법의 보호 또한 받기 힘들다. 법을 제도라고 해도 좋다. 가진 자들이 제도를 만든다. 법을 잘 아는 사람들이 법을 피해 이익을 취한다. 학벌도 없고, 돈도 없는 난쟁이 아버지는 애초부터 이 사회의 변방으로 내쫓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난쟁이 가족은 서울특별시 낙원구 행복동에 산다. 낙원과 행복이라는 말이 붙은 장소에서 그들은 지옥보다 더 끔찍한 삶을 산다. 하루하루를 살기도 힘든데, 집을 비우라는 철거계고장까지 날아든다. 난쟁이 가족이 사는 땅이 개발된단다. 판자촌을 허문 자리에 아파트를 짓는단다. 어머니는 대문 기둥에 붙은 알루미늄 표찰을 떼어 보관한다. 철거민들마다 아파트에 입주할 입주권이 나오지만 이들은 돈이 없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개발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아파트를 짓는 기업의 이익을 위해 개발이 이루어진다. 자본은 가난한 자들을 고려하지 않는다. 자본의 목적은 오로지 자본을 증식하는 데만 있다. 돈이 돈을 낳는 사회에서 자본은 돈이 되지 않는 이들을 가차 없이 자본의 바깥으로 내쫓는다.

 

돈이 많은 사람들이 철거민들의 입주권을 사들인다. 아파트에 입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입주권을 되팔아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다. 그동안 수많은 정치인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그들은 선거철만 되면 난쟁이 아버지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판자촌 건물을 양성화시켜 주겠다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난쟁이 아버지가 찍은 사람들은 구청장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판자촌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증오했다. 그들은 거짓말쟁이였다. 그들은 엉뚱하게도 계획을 내세웠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계획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많은 계획을 내놓았다. 그런데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설혹 무엇을 이룬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고통을 알아주고 그 고통을 함께 져줄 사람이었다.”(42)

 

이 소설은 난쟁이 아버지를 둔 세 남매의 시선으로 가난한 이들이 감당해야 비참한 삶을 그리고 있다. 맏이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동네 사람들이 다니는 공장을 다니지 않으려고 한다. 공장에 다니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공부를 하는 것이다. 문제는 공부를 하려면 그만큼 돈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난쟁이 아버지는 채권매매, 칼 갈기, 고층건물 유리 닦기, 펌프 설치하기, 수도 고치기 등을 하며 어머니와 함께 살림을 꾸렸지만, 남은 것은 건강이 나빠진 것밖에는 없다. 그는 꼽추와 함께 서커스단에 들어가려고 하지만, 가족들의 반대로 이 일 또한 무산된다. 이후 아버지는 의욕을 상실한 채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삶에 지쳐서 그런 거라며 아버지 대신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인쇄 공장에 나간다. 어머니가 이러는데 맏이가 어떻게 공부만 할 수 있을까?

 

맏이가 학교를 그만두자 동생들도 학교를 그만둔다. 공부도 먹고사는 일이 해결되어야 할 수 있는 법이다. 아무리 공부를 하고 싶어도 먹고사는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그럴 수 없다. 맏이는 먹고살기 위해 공부를 포기하고 공장에 나간다. 사람들은 게으른 사람이 가난하다고 말하지만, 사실 가난한 사람은 결코 게으를 수 없다. 게으르면 하루 한 끼를 먹는 것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이런저런 일을 부지런히 한다. 그런데도 도통 돈이 모이지 않는다. 일은 많이 하는데 받는 돈은 적기 때문이다. 맏이가 왜 공장에 다니지 않기 위해 공부를 한다고 하겠는가? 돈을 많이 주는 회사에 들어가려면 공부를 해서 대학에 가야 한다. 공부에 돈을 투자해야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고나 할까?

 

이렇게 보면 난쟁이 아버지를 둔 아이들은 애초부터 돈을 벌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려 있다. 가난은 아버지에서 아이들로 세습된다. 열심히 일할수록 더욱 더 가난해지는 이 모순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개천 건너 주택가에서 가정교사를 하는 지섭은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은 사랑이 없는 욕망만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 한 사람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만 사는 땅은 죽은 땅입니다.”(54) 사랑이 없는 욕망은 오로지 자기 이익만을 탐하는 자본을 빼어 닮았다. 자본의 중심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람들은 스스로 자본의 욕망을 몸속 깊이 받아들인다. 자본의 속성을 내면화하지 않으면 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무한 경쟁 사회는 끊임없이 경쟁이 벌어지는 광장으로 사람들을 몰아넣는다. 경쟁에서 살아남으면 피라미드의 끝으로 오를 수 있고, 경쟁에서 낙오하면 피라미드의 아래로 내려가거나, 아예 피라미드의 밖으로 내쫓길 수 있다. 사랑이 없는 욕망이 없이 어떻게 피라미드의 끝으로 올라갈 수 있을까? 지섭은 이 죽은 땅을 떠나 달나라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 달나라가 희망이라고? 지섭의 영향을 받은 아버지는 불가능한 꿈을 꾸고 있다. 그만큼 아버지는 이 사회에서는 어떤 희망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다. 벽돌 공장의 높은 굴뚝으로 올라간 아버지는 그곳에서 종이비행기를 날린다. 아버지가 날린 종이비행기는 높디높게 날아올라 달나라로 가게 될까? 이것이 불가능한 환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런 환상에라도 의지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세상을 난쟁이 아버지는 살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

 

이제는 둘째 아들 영호가 보는 세상이 그려진다. 맏이인 형이 보는 세상이나 동생인 영호가 보는 세상이나 다르지 않다. 영호는 지금 여동생인 영희를 찾고 있다. 영희를 마지막으로 목격했다는 주정뱅이는 비행접시가 영희를 데려갔다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한다. 부동산 업자에게 돈을 받고 입주권을 파는 그날 영희는 사라졌다. 집을 떠나야 할 날이 왔는데도 영희는 돌아오지 않는다. 나쁜 일은 겹쳐서 오는 것인지, 영호는 공장에도 나가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회사의 부당한 처사에 맞서 형을 비롯한 공원들과 더불어 싸울 계획을 세웠지만, 앞장을 선 형과 영호만 공장에서 쫓겨났다. 회사 사장은 형과 영호가 들어간 블랙리스트를 다른 회사로 돌렸다. 살 길을 아예 막아버린 것이다.

 

이들이 커다란 요구를 한 것도 아니다. 그들은 공장 식탁에 간이 맞은 무말랭이가 오르기를 원했다. 회사 사장은 불황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시간이 갈수록 회사 규모를 더욱 더 키웠다. 공장 식탁에 오르는 무말랭이는 여전히 간이 맞지 않았고, 야간 작업수당도 많이 줄었다. 회사는 점점 커지는데 노동자들의 삶은 개선되지 않았다. 우리 공원들은 우리가 아는 것만큼밖에는 사물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도 땀으로 다진 기반을 잃고 싶어 하지 않았다. 회사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싫어했다. 공원들은 일만 했다.”(59)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공원들을 회사는 주저 없이 쫓아냈다. 한편으로 회사는 문제를 일으키는 공원들을 블랙리스트로 작성해 정보를 공유했다. 노동 말고는 달리 길이 없는 노동자들은 먹고살기 위해 생각하고 저항하는 길을 포기해야만 했다.

 

영호가 보기에 형은 생각이 깊었다.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그만두고 나서도 항상 책을 읽었다. 일 이외의 다른 생각을 하는 공원을 회사는 싫어한다고 했다.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회사가 벌이는 일에 사사건건 참견을 하기 때문이다. 회사는 노동자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을 줄이려 하고, 노동자들은 어떻게든 회사로부터 더 많은 월급을 받으려고 한다.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노조를 만든다. 노조의 힘이 커질수록 회사는 노동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이를 막기 위해 회사는 노동자들이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고 한다. 동시에 노동자들이 어울릴 수 있는 상황도 어떻게든 막으려고 한다. 사람들이 모여야 노조도 만들어지는 것 아닌가. 회사는 결국 형과 영호를 희생양 삼아 공원들에게 강력한 경고를 보낸 셈이다.

 

난쟁이 가족은 입주권을 25만 원에 팔았다. 입주권을 산 사람은 부동산 업자였다. 25만 원에 사들인 입주권을 그는 이익을 덧붙여 다른 이들에게 되팔 것이었다. 돈이 돈을 낳는다. 돈 있는 사람이 더 많은 돈을 번다는 말이다. 부동산 업자는 살 집이 필요해서 입주권을 사들이는 게 아니다. 그들에게 입주권은 곧 자본을 증식하는 도구와 같다. 입주권을 많이 모을수록 이익이 커지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개발이 되면 누군가는 삶터를 잃고, 누군가는 돈을 번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펼치는 게임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익을 얻을 수는 없다. 누군가 이익을 얻으려면 누군가는 손해를 봐야 한다. 부자가 손해를 볼 리는 없다. 손해는 늘 가난한 이들이 본다. 자본력이 딸리기 때문이다.

 

난쟁이 아버지는 여전히 지섭과 붙어 다닌다. 아버지는 달에 가서 천문대 일을 보기로 했단다. 지섭이 미국에 있는 존슨 우주 센터에 편지를 써 보냈단다. 자신을 미치광이 취급하는 영호를 향해 아버지는 미친 사람들이 세상을 이끈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점점 현실을 떠나 이상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있다. 그만큼 현실을 사는 게 힘들다는 얘기다. 아버지는 현실에 발을 딛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달나라를 꿈꾼다. 달나라는 현실과 관련이 없다. 아버지는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영호에게 쇠공을 쏘아 올리겠다는 말까지 한다. 쇠공을 하늘 높이 쏘아 올리려면 중력을 이겨야 한다. 중력에 갇힌 채 어떻게 달나라로 갈까?

 

아버지는 지섭이 쇠공을 달나라로 쏘아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섭이 신이라도 되는 것일까? 철거를 하는 날 아침, 지섭이 쇠고기를 들고 난쟁이네 집에 들른다. 식구들이 모여 아침을 먹는데, 철거반원들이 몰려와 담을 부순다. 뿌연 먼지 사이로 밥을 먹는 사람들과 담을 부수는 사람들이 마주한다. 한쪽은 묵묵히 식사를 하고, 한쪽은 묵묵히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린다. 식사를 끝낸 가족들이 밖으로 짐을 옮긴다. 관리자에게 다가간 지섭이 주먹을 휘두른다. 쇠망치를 든 사람들이 지섭에게 달려든다. 순식간에 난쟁이 집은 아수라장이 된다. 머리에서 피가 흐르는 지섭을 사람들이 끌고 간다. 아버지가 그 뒤를 따라 나선다. 어머니는 몸을 떨면서 울고 있다. 아버지는 과연 지섭을 따라 달나라로 갈 수 있을까?

 

아버지가 달나라로 가는 꿈을 꾸고 있다면, 형과 영호는 간이 맞는 무말랭이가 나오는 식탁을 꿈꾸고 있다. 아버지는 온몸을 내리누르는 현실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다. 중력의 감옥을 탈출한 사람만이 달나라로 갈 수 있다. 형과 영호는 아버지보다 현실적인 꿈을 꾼다. 그들은 생명으로 태어난 이상, 현실의 중력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중력에 매여 허덕이는 삶을 사는 것도 못마땅하다. 그래서 그들은 현실을 바꾸려고 했지만,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회사 바깥으로 내몰렸다. 바깥을 꿈꾸는 아버지나, 어떻게든 안에서 살아남으려는 형과 영호 모두 현실에 발을 딛지 못한다. 현실에 뿌리를 내리려면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들은 끊임없이 바깥을 상상하고 있다. 자본이 가장 싫어하는 일을 그들은 암묵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이 만든 완벽한 성채

 

난쟁이 가족은 한없이 무기력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입주권을 비싼 값으로 팔아 다른 삶터를 마련하는 일이다. 난쟁이 가족의 막내이자 외동딸인 영희의 시선으로 또 다른 이야기가 전개된다. 입주권을 파는 날 사라진 영희는 부동산 업자와 밤을 보냈다. 아버지의 재력을 등에 업은 스물아홉의 남자는 돈의 힘으로 열일곱 여자를 꼬인다. 정확히 말하면 입주권을 되찾으려는 생각에 영희 스스로 남자에게 다가간다. 남자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다. 말을 잘 들으라는 것. 남자는 왜 영희에게 관심을 가진 것일까? 예쁜 여자이기 때문이다. 남자는 돈으로 영희를 산다. 말을 잘 들으면 입주권 한 장 쯤 아무렇지 않게 돌려줄 수 있다. 이게 돈의 힘이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살 수 있다. 돈이 없는 사람들이 스스로 흥정을 해 오기도 한다.

 

영희는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사막으로 이어지는 지평선을 떠올린다. 어둘 녘에 모래 섞인 바람이 분다. 선 하나로 표시될 그 지평 끝에 내가 알몸으로 서 있다. 다리를 약간 벌리고 팔을 안으로 끌어들였다. 머리도 반쯤 숙여 나의 머리카락이 나의 가슴을 덮었다. 눈을 감고 열을 세면 나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78) 영희는 이 세계를 회색으로 표현한다. 죽음으로 덮인 세계이니,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피어나지 않는다. 입주권을 산 남자의 세계는 어떨까? 아무도 그에게 안돼요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사는 세계를 지배하는 왕이다. 영희가 지옥불보다 뜨거운 세상에 태어났다면, 남자는 편안하고 달콤하고 따뜻한 세상에 태어났다. 회색이 아닌 천연색의 세계.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세계.

 

영희는 남자에게 몸을 주었고, 남자는 영희에게 입주권을 주었다. 부모와 오빠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영희는 해냈다. 그녀는 어리고 예쁜 여자였기 때문이다. 남자와 있는 동안 영희는 악몽을 꾸었다. 꿈속에서 어머니는 빨리 일어나 옷을 입으라고 외쳤다. 주인 서방과 잠자리를 함께했다가 사매질을 당한 증조할머니 동생 이야기도 했다. 영희가 자신은 그와 다르다고 외치자, 어머니는 어린 게 벌써부터 그것을 좋아한다며 힐난을 한다. 몸을 팔아 입주권을 되찾는 일이 도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걸 영희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을 알면서도 영희는 몸을 판다. 이 방법이 아니면 입주권을 찾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도덕 너머에 돈이 있다. 도덕을 넘지 않으면 영희는 손에 돈 한 푼 쥘 수 없다.

 

남자는 영희가 처한 상황을 적절히 이용한다. 그는 영희의 몸을 좋아할 뿐이다. 돈만 주면 그는 영희의 몸을 마음껏 탐할 수 있다.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므로 헤어지기도 쉽다. 영희는 돈을 원하고, 남자는 영희의 몸을 원한다. 영희의 몸을 돈으로 환산하는 순간, 남자는 도덕이니 하는 사회통념으로부터 멀찌감치 벗어날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돈이 도덕을 만든다. 남자가 영희에게 요구한 것은 안돼요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말로 자신의 의지를 드러낸다. ‘안돼요라는 말은 곧 거부의지가 아닌가. 남자는 영희의 자유의지를 돈으로 구매한다. 참으로 신비로운 힘을 가진 돈이 아닌가. ‘이라는 기호에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사람들의 지독한 욕망을 이해할 만도 하다.

 

구청 주택과에서 입주 신청을 마친 영희는 아버지와 잘 아는 신애 아주머니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그녀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벽돌공장 굴뚝을 허무는 날이었다. 아버지는 벽돌공장 굴뚝에 올라가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동시에 이 굴뚝은 아버지가 지섭과 함께 저 먼 하늘 위로 쇠공을 쏘아 올릴 곳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굴뚝 속으로 떨어져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영희의 뇌리에 헐린 집 앞에 서 있는 아버지가 떠오른다. 아버지 몸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진다. 영희는 오빠들과 함께 까만 쇠공이 머리 위 하늘을 일직선으로 가르며 날아가는 장면을 본다. 벽돌공장 굴뚝 위에 선 아버지가 손을 흔들어 보인다. 환상이다. 입주권을 찾아왔는데 아버지는 이미 저 먼 곳으로 떠났다.

 

목 놓아 우는 영희를 큰오빠가 달랜다. 영희는 큰오빠에게 아버지를 난쟁이라고 부르는 악당을 죽여 버리라고 외친다. 큰오빠가 그러겠다고 다짐한다. 물론 영희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상상이다. 영희는 아버지를 죽인 세상을 용서할 수 없다. 아버지를 난쟁이라고 부르며 깔보는 세상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다. 아버지는 죽어서야 비로소 중력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났다. 스스로 쇠공이 되어 하늘 저 너머로 날아간 아버지가 서러워 영희는 세상을 향해 분노를 터뜨린다. 시간이 흐르면 세상에 대한 영희의 분노는 사그라질 수 있을까? 그럴 리가 없다. 영희는 돈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돈이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사회를 우리는 살고 있다. 난쟁이 가족이 겪은 이 끔찍한 지옥도는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펼쳐지고 있다. 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아무 생각도 없이 오로지 일만 하려고 한다. 생각을 한다고 변할 세상이 아니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는 속담을 사람들은 철석같이 믿고 있다. 모난 생각을 하면 피라미드 바깥으로 내쫓긴다. 자본은 그 누구도 허물지 못하는 완벽한 성채를 만들어, 자본의 뜻을 어기는 사람들을 성채 밖으로 몰아낸다. 성채 안에서 살아남으려면 자본의 뜻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스스로 자본이 되어 자본 증식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난쟁이 가족보다 더한 비극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이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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