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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도서] 채식주의자

한강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 한강, 「채식주의자」

 

 

 

그녀는 왜 채식을 시작했을까?

 

한강의 연작소설 <채식주의자>는 전체 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작품인 「채식주의자」는 갑자기 채식을 시작한 여자(김영혜)와 남편을 비롯한 가족들의 갈등 상황을 다루고 있고, 두 번째 작품인 「몽고반점」은 여자(처제)의 엉덩이에 새겨진 몽고반점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는 남자(형부)의 미묘한 심리를 그리고 있다. 마지막 작품인 「나무 불꽃」은 채식주의자 영혜의 언니(김인혜)를 서술자로 하여 음식을 거부한 채 식물이 되려는 영혜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한강은 특유의 섬세한 문체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들의 비극을 찬찬히 그려내고 있다. 아무도 채식을 시작한 영혜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채식주의자」는 영혜의 남편을 서술자(‘’)로 불러낸다. 남편은 아내를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특별한 매력도, 그렇다고 특별한 단점도 없는 그녀가 편안해서 그는 별다른 고민 없이 그녀와 결혼을 했다. 남편은 자기에게 과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결코 가까이 하지 않았다. 예쁘거나, 총명하다거나, 눈에 띄게 요염하다거나, 부유한 집안의 따님이라거나 하는 여자들은 애초부터 나에게 불편한 존재일 뿐이었다.”(10) 모가 나서 정을 맞는 삶을 남편은 처음부터 피했다. 아내가 될 여자 또한 당연히 그러길 바랐고, 특별하다고 할 게 없는 영혜와 그는 자연스레 인연을 맺었다.

 

영혜는 남편의 기대대로 평범한 아내의 역할을 잘 해냈다. 아침이면 출근하는 남편을 먹이기 위해 밥을 하고 국을 끓였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적은 돈이나마 살림에 보탰다. 남편에게 별다른 것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남편의 귀가 시간이 늦어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인 삶이 반복되었지만 남편은 이리 단순한 삶을 감사히 여기며 살았다. 평소에도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 아내를 이상스레 느낀 적도 있지만, 브래지어가 가슴을 조여 그런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는 과민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만 않는다면 무방할 것이었다. 아내가 그 정도는 스스로 알아서 할 것이라고 남편은 생각했다.

 

이토록 평범한(?) 삶에 아내가 돌 하나를 던졌다. ‘채식이라는 돌. 어느 날 아침, 아내는 냉장고에 든 냉동식품을 커다란 쓰레기봉투에 내버렸다. 쇠고기와 돼지고기, 토막 난 닭, 이십만 원이 넘는 바다장어가 쓰레기봉투 속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 꿈을 말하는 아내의 얼굴이 남편은 참으로 낯설었다. 꿈이라니, 출근 준비로 바쁜 이 아침에 아내는 부스스한 얼굴로 꿈 타령을 하고 있다. 꿈이 어쨌단 말인가. 얼마나 대단한 꿈을 꾸었기에 하루가 시작되는 이 아침 시간을 망쳐놓는단 말인가. 남편은 어제와 다른 오늘이 낯설지만, 이 생각에 빠져 있을 겨를이 없다. 하루 치 일을 시작할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혜는 도대체 무슨 꿈을 꾸었을까? 어두운 숲에서 그녀는 수백 개의, 커다랗고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이 기다란 막대에 매달려 있는 걸 본다. 채 마르지 않은 피가 흘러내리는 고깃덩어리도 있다. 고깃덩어리를 아무리 헤치고 나가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입고 있는 흰 옷에 온통 핏물이 스며든다. 간신히 그곳을 빠져나온 영혜는 계곡을 거슬러 달리고 또 달렸다. 갑자기 숲이 환해지더니 돗자리를 깔고 앉은 수많은 사람들이 고기를 구워 먹으며 즐거이 노는 장면이 문득 눈앞에 펼쳐진다. 엉겁결에 그녀는 나무 뒤로 몸을 숨긴다. 손에도, 옷에도 피가 묻어 있다. 그녀는 비로소 헛간에서 주워 먹은 고깃덩어리를 기억한다.

 

그렇게 생생할 수 없어, 이빨에 씹히던 날고기의 감촉이. 내 얼굴이, 눈빛이. 처음 보는 얼굴 가운데, 분명 내 얼굴이었어. 아니야, 거꾸로, 수없이 봤던 얼굴 같은데, 내 얼굴이 아니었어. 설명할 수 없어.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생생하고 이상한, 끔찍하게 이상한 느낌을. (19)

날고기에 묻은 피를 잇몸과 입천장에 바르다가 영혜는 헛간 바닥에 고인 피 웅덩이에 눈길을 모은다. 이상하게 빛나는 그녀의 눈이 보인다. 피 웅덩이에 비친 이 눈빛과 얼굴이 그녀는 참으로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자기이면서도 자기가 아닌 것 같은 얼굴. 잠을 깨고 나서도 영혜는 이빨에 씹히던 날고기의 비린 감촉을 온몸으로 느낀다. 꿈속의 장소인 어두운 숲은 물론 무의식과 이어지는 공간일 것이다. 평소에는 눌려 있던 무의식이 어느 순간 꿈속에서 활짝 펼쳐진다. 왜 하필 지금 이 순간에 그녀가 이런 꿈을 꾸었는지에 대해서는 이 소설에 명확히 나오지 않는다. 하긴 이유가 있어 꿈을 꾸던가. 꿈 자체가 이유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영혜가 원래부터 고기를 먹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남편의 말마따나 그녀는 먹성이 좋았다. 불판에 얹힌 갈비를 익숙한 솜씨로 뒤집어 집게와 가위로 쓱쓱 고기를 잘라냈다. 일요일이면 삼겹살이나 쇠고기, 닭고기로 특별식을 만들어 남편의 입맛을 돋우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아예 고기를 끊어버리겠단다. 식탁에 고기반찬을 전혀 올리지 않겠단다. 평범한 삶을 소망하는 남편 입장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얘기다. 고기를 먹지 않고 어떻게 이 힘든 일상을 보낸단 말인가. 밥과 된장을 상추에 싸서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먹는 아내를 보며 남편은 자신이 아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육식의 반대편에 채식이 있다고?

 

채식을 시작하면서 영혜는 잠을 자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채식이 문제가 아니라 꿈이 문제였다. 헝클어진 머리에 까칠한 얼굴로 그녀는 아침식탁에 앉아 남편을 맞았다. 남편과 섹스를 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남편 몸에서 고기냄새가 난다는 게 이유였다. 땀구멍 하나하나에서 고기냄새가 올라온다는 것. 그렇다고 영혜가 집안 살림을 방치한 것은 아니었다. 날마다 청소를 해서 집안은 늘 깔끔했다. 주말이면 나물 두어 가지를 무치고, 고기 대신 버섯을 넣은 잡채를 만들어 식탁 위에 올려놓기도 했다. 어두운 숲속의 헛간, 피 웅덩이에 비친 얼굴이 나오는 꿈 이야기만 안 한다면 남편은 그럭저럭 지낼 만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영혜의 몸은 한없이 메말라갔다. 앙상한 뼈대만 남아 환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영혜의 채식은 집안 내력과도 상관없었다. 아버지는 육회를 즐겼고, 어머니는 직접 활어회를 떠 사위를 대접했다. 그 밑에서 자란 언니와 영혜 또한 정육점용 칼로 닭 한 마리를 거뜬히 토막 낼 정도는 되었다. 남편은 지극히 평범하게 사는 이 집안이 편안했고, 이 집안의 딸인 아내가 편안했다. 정신상담이나 치료를 받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남편은 애써 그 일만은 피하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나에게는 이상한 일들에 대한 내성이 전혀 없었다.”(26)

 

작가는 소설의 사이사이에 영혜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이탤릭체로 배치하고 있다. 그 중 하나에는 영혜가 피 웅덩이 꿈을 꾸기 전날 아침의 상황이 제시되어 있다. 그날 아침 영혜는 얼어붙은 고기를 칼로 썰고 있었다. 남편의 재촉에 일을 서두르던 그녀는 그만 손가락을 벤다. 식칼의 이가 나간 것도 모른 채 영혜는 붉은 핏방울이 피어나는 검지손가락을 입속에 넣는다. 들큼한 피 맛이 난다. 마음이 진정된다. 불고기를 우물거리던 남편이 갑자기 입안에 든 고기를 뱉어난다. 고기에서 칼 조각이 나온다. 남편이 죽을 뻔했다며 소리를 친다. 이 순간 그녀는 오히려 침착해진다. 자기를 둘러싼 모든 것이 썰물처럼 밀려나가는 느낌이 든다.

 

남편에게 그녀는 평범한 일상을 그저 같이 누리는 존재일 뿐이다. 부부가 그런 거 아니냐고? 아니다. 영혜는 남편과의 사이에 가로놓인 막막한 거리를 느낀다. 나와, 내가 앉은 의자만 무한한 공간 속에 남은 것 같았어.(27)라는 영혜의 고백을 보라.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가 남편과 느끼는 거리감은 더욱 더 깊어진다. 영혜는 남편의 미래와 직결된 회사 간부 모임에서도 육식을 거부한다. 게다가 그녀는 브래지어도 하지 않은 채 모임에 나가 사람들의 눈총을 받는다. 사람들은 육식은 본능이라느니, 골고루 먹는 게 좋다느니 하는 말로 영혜를 몰아붙인다. 매끄러운 바닥에 볼록 튀어 나온 돌멩이를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영혜가 바로 그런 신세다.

 

영혜가 고기를 먹지 않자 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일제히 그녀를 부담스러워 한다. 육식에는 한 사회를 지배하려는 권력자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 육식을 본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채식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채식을 선언한 그녀는 육식을 하는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도리어 육식을 하는 사람들이 그녀를 비난한다. 육식이든, 채식이든 취향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채식을 종교와 연결시키는 사람이 있을까. 육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채식은 사회 통념을 거부하는 행위로 비쳐진다. 채식 이데올로기는 바로 육식이라는 틀 속에서 비롯되는 셈이다.

 

영혜는 예전부터 난, 누군가가 도마에 칼질을 하는 걸 보면 무서웠어.(37)라고 고백한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삽으로 내리치는 꿈을 반복해서 꾸기도 한다. 채식을 선언하기 전날 그녀는 언 고기를 썰다가 손을 벤 적이 있다. 도마에 놓인 고기를 칼질할 때마다 그녀는 무의식 깊이 드리워진 이 꿈을 떠올린다. 그녀의 채식은 그러므로 고기를 칼질하는 공포와 깊숙이 이어져 있다. 영혜는 그러니까 육식과 싸우는 게 아니라 마음 속 공포와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를 알 리 없는 사람들은 육식의 논리로 채식을 선언한 그녀를 비난한다. 채식을 해야 그녀는 그나마 숨통이 트인다. 살기 위해 채식을 하는 그녀에게 사람들은 육식을 해야 살 수 있다고 강조한다. 평행선이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나는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 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43)

 

먹어라. 애비 말 듣고 먹어.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다. 그러다 병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냐.”

가슴 뭉클한 부정(父情)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마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그랬을 것이다. 허공에서 조용히 떨고 있는 장인의 젓가락을 아내는 한손으로 밀어냈다.

아버지,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

순간, 장인의 억센 손바닥이 허공을 갈랐다. 아내가 뺨을 감싸쥐었다. (49)

 

믿을 건 둥근 가슴밖에 없다고 말하는 영혜에게 아버지는 억지로 고기를 먹이려고 한다. 남편은 이를 부정(父情)이라고 표현한다. 겉으로만 보면 그렇다. 육식을 끊은 영혜는 날이 갈수록 야위고 있으니까. 가부장의 권력을 지닌 아버지는 딸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는 채식을 하는 딸로 해서 사위 볼 면목이 없다. ‘면목이라는 말은 체면을 의미한다. 사위 앞에서 아버지는 가부장으로서 위신을 세우려고 한다. 한데 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아버지는 거침없이 딸의 뺨을 때린다. 폭력을 써서라도 딸을 자기 무릎 아래 꿇릴 기세다. 폭력을 행사하면 딸이 고기를 먹을 거라고 아버지는 생각하는 것일까?

 

다른 가족들이 영혜의 양 팔을 잡은 상태에서 아버지는 다시 영혜의 입에 억지로 고기를 넣으려고 한다. 도대체 그녀가 고기를 먹으면 무엇이 달라지는 것일까? 아버지가 필사적이듯 영혜도 필사적이다. 입속에 들어간 탕수육을 뱉어낸 영혜가 상에 놓여 있던 과도를 집어 자신의 손목을 그어버린다. 채식이 그녀의 숨통을 트이게 한다고 했다. 돌려 말하면 육식은 그녀의 숨통을 옥죈다. 남편이나 아버지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 고기만 먹으면 모든 일을 해결될 거라고 믿는다. 채식의 맞은편에 육식을 놓고 있기 때문이다. 영혜는 마음 속 공포를 채식으로 길들이고 있다. 그런 아내에게, 그리고 딸에게 육식을 강요하는 꼴이라니.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작가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영혜의 무의식 깊이 자리하고 있던 기억 하나를 끄집어낸다. 아홉 살 때, 그녀는 집에서 기르던 개에게 물렸다.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흐르는 무더운 여름 날, 아버지는 오토바이에 개를 매달았다. 나무에 매달아 불에 그슬리면서 때리는 것보다 달리다 죽은 개가 더 부드럽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고 했다. 아홉 살 영혜는 문간에 서서 오토바이를 따라 달리고 달리다가 지쳐 나자빠지는 개를 본다. 동네를 다섯 바퀴 돌자 개는 입에 거품을 문다. 줄에 걸린 목에서는 피가 흐른다. 일곱 바퀴째가 되자 개는 축 늘어진 채 오토바이에 실려 왔다. 영혜는 이 모든 장면을 문간에 서서 똑똑히 바라보았다.

 

그날 저녁 시장 아저씨들이 영혜네 집에 모였다. 그들은 개에게 물린 상처를 치료하려면 개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했다. 영혜는 장국에 밥을 말아 한 그릇을 다 비웠다. 그녀는 거품 섞인 피를 토하며 자기를 보던 개의 두 눈을 성인이 된 지금도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아무렇지도 않더군.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어.(53)라고 그녀는 간절하게 읊조리고 있지만, 정말로 아무렇지 않다면 이런 말을 반복할 리가 없다. 가슴 깊이 맺힌 이 기억을 놓아버리기 위해 그녀는 엄마처럼, 언니처럼 아무렇지 않은 듯닭고기를 토막 내고, 불 위에 갈비를 놓았는지도 모른다. 무의식에 새겨진 기억을 의식적으로 억압했다고나 할까.

 

병원에 실려가 응급 처지를 받은 영혜는 이내 안정을 찾는다. 남편은 채식을 말린다고 손목을 긋는 아내도 부담스럽지만, 다 큰 딸에게 손찌검을 하는 장인 또한 부담스럽다. 남편은 어서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 이인용 병실에는 아내 말고 장 파열로 입원한 여고생과 그 부모가 있다. 그는 그 사람들의 시선이 한없이 부담스럽다. 아픈 아내는 안중에도 없다. 퇴원한 아내와 영위할 일상이 끔찍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 이상하고 무서운 여자와 어떻게 한 이불을 덮고 잔단 말인가. 남편은 모가 나지 않은 평범한 여자를 원했다. 사랑이니 하는 감정 놀이에 휘둘리지 않는 평탄한 삶을 누리고 싶었다. 그것이 아내로 해서 깨어졌다.

 

영혜 엄마는 아픈 딸에게 먹이기 위해 흑염소를 고아 온다. 지극한 모정(母情)으로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할까? 아버지는 아버지의 관점으로 딸을 보고, 엄마는 엄마의 관점으로 딸을 본다. 그들은 딸이 고기를 먹기만 하면 이 고약한 상황을 벗어날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폭력을 써서든, 거짓말을 해서든 딸에게 고기를 먹이려고 한다. 그럴수록 상황은 더욱 더 악화된다. 영혜는 몸이 아픈 게 아니라 가슴이 아픈 것이다. 고기를 먹으면 몸이야 좋아질지 모르지만, 아픈 마음은 어찌할 것인가. 영혜는 단 한 번만이라도 세상을 향해 크게 소리를 내뱉고 싶다. 가슴에 맺힌 덩어리를 뱉어내고 싶다.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61)

 

영혜는 아무도 자기를 도울 수도, 살릴 수도, 숨 쉬게 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숨을 쉬고 싶어 채식을 선택한 그녀에게 사람들은 육식을 해야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너무 많이 먹은 고기의 목숨들이 명치에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다고 여긴다. 고기를 먹을수록 명치에 달라붙는 덩어리 또한 커질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고기를 먹을 수 있는가? 이것은 이데올로기 문제가 아니다.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생명의 자리에 그녀가 선택한 채식이 있다. 남편을 비롯한 가족들은 영혜가 그토록 알리고 싶은 이 아픔을 이해하지 못한다. 한가지 사실만은 분명했다. 이런 일은 나에게 일어나선 안되었다.”(61)라고 생각하는 남편을 보라.

 

남편은 병실에서 얼핏 꿈을 꾼다. 누군가를 죽이는 꿈이다. 칼로 배를 힘껏 가른 뒤 길고 구불구불한 내장을 꺼낸 후, 물컹한 살과 근육을 모두 발라내는 꿈. 잠에서 깨는 순간 남편은 꿈에서 죽인 그 사람이 누구인지 잊는다. 아직 어둠이 짙게 깔린 새벽, 남편은 혹시나 해서 아내가 덮은 담요를 걷어본다. 검지손가락을 아내의 인중에 대어본다. 가늘게 숨이 느껴진다. 아내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꿈으로 드러난 것일까?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난 상황에서 남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니다. 아내의 아픈 마음을 헤아리는 일을 해야 하지만, 남편은 도무지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이 소설은 남편인 의 시선으로 사건이 서술되고 있다. 모가 나지 않는 평범한(?) 삶을 살려는 남편의 맞은편에 극단적인 채식을 선택한 아내가 있다. 아내는 꿈 이야기로 채식의 이유를 말하지만, 남편은 아내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린다. 아내의 입장에 서는 법이 없는 사람이 바로 남편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병실에서 나간 영혜가 환자복 상의를 벗은 채로 분수대 옆 벤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도 그는 애써 외면한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다. 마치 타인인 듯한 표정으로 남편은 지쳐 보이는 아내의 얼굴을, 무엇을 먹었는지 빨갛게 젖은 아내의 입술을 바라본다.

 

영혜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남편은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옮겨 아내에게 다가간다. 환자복으로 아내의 메마른 가슴을 먼저 가린다. 아내는 더워서 벗은 것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안 되냐고 묻는 아내의 얼굴에서 짙은 쓸쓸함이 묻어 나온다. 아내가 움켜쥔 오른손을 펼치자 피에 젖은 새 한 마리가 떨어진다. 포식자에게 뜯긴 듯한 거친 이빨자국 아래로, 붉은 혈흔이 선명하게 번져 있었다.”(65) 영혜가 포식자가 되어 작은 동박새를 물어뜯은 것일까? 남편의 눈으로 그려지는 이야기를 우리는 읽고 있다. 그는 아내를 미친 여자로 판단한다. 남편에게 미친 여자란 평범한 일상을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남편의 생각대로 영혜는 정말로 미친 것일까? 평범한 일상을 기준으로 영혜를 본다면, 그녀는 분명 제정신이 아니다. 이탤릭체로 된 부분을 제외하면, 작가는 남편의 시선으로 영혜의 행적을 그리고 있다. 영혜의 시선과 남편의 시선은 평행선을 달린다. 영혜는 무의식에 새겨진 진실로 치닫고 남편은 어떻게든 아내의 삶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 사이에는 깊고도 깊은 어둠만이 드리워져 있을 따름이다. 평범함으로 가장된 남편의 건조한 의식세계를 욕할 필요는 없다. 남편은 이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남편의 마음자리에는 애초부터 일상을 허무는 아내를 받아들일 장소가 부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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