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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그 해 여름

[도서] 노근리, 그 해 여름

김정희 저/강전희 그림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누구를, 무엇을 위해 전쟁은 일어나나?

- 김정희, 『노근리, 그 해 여름』

 

 

 

그 해 여름에 일어난 비극

 

노근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6.25 전쟁이 일어난 그 해 여름, 미군을 따라 피난길을 떠난 양민들은 노근리(충북 영동군)에 있는 쌍굴에서 이유도 모른 채 죽임을 당했다. 살육을 저지른 미군과, 그들의 힘으로 남한을 지킨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역사에서 지우려고 했다. 사건의 가해자인 미군들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양민들을 지켜야 할 정부는 왜 진실을 은폐하려고 한 것일까? 진실이 알려지면 미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공산주의로부터 남한을 지켜주는 우방이 친구나라(?)의 양민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하다니,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시간이 흘러 당시 사건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졌지만, 남한 정부와 미국은 발뺌을 하기 바빴다. 쌍굴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피해자들이 증언을 하는데도 그들은 사실을 부인하기만 했다. 사실을 인정하면 남한 권력층과 미국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난다. 아무리 전쟁 상황이었다고 해도 그들은 총칼로 앞세워 200명이 넘는 양민들을 학살했다. 노근리 근방에 살던 주곡리와 임계리 사람들은 미군을 따라 노근리 쌍굴로 피난을 갔다가 미군이 사정없이 내쏘는 총탄 아래 속절없이 죽어갔다. 미군은 왜 노약자가 대부분인 양민들을 향해 총을 난사한 것일까?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이 빚은 역사적 비극이라는 말로 대답이 될 수 있을까?

 

김정희는 소년소설이라는 이름이 붙은 ??노근리, 그 해 여름??에서 노근리에서 벌어진 비극의 역사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주인공인 은실이 가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이 소설에서 작가는 죽은 사람보다 더욱 더 가슴 아픈 삶을 살아야 하는 산 자들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죽은 자들은 더 이상 말이 없지만, 산 자는 그들을 기억하며 끊임없이 말을 해야 한다. 죽은 자들이 죽은 이유를 물어야 하고, 비극이 넘쳐나는 이 세상과 어떻게 맞서야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갓 열 살을 넘긴 주인공 은실은 쌍굴에서 엄마를 잃었다. 엄마는 은실을 끌어안은 채 미군이 쏜 총에 등을 맞고 죽었다.

 

피난을 시킬 때부터 미군은 마을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었다. 오죽하면 은실이 할머니가 일본놈들이나 미국놈들이나 남의 집에 들어와서 총칼로 행패를 부리는 건 똑같다는 말을 했을까. 은실이 다닌 (초등)학교 선생님은 미군이 공산당을 내몰고 사람들을 도울 거라고 했다. 은실은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이 믿음은 그러나 쉬이 깨져버렸다. 피난길에서 미군은 흰 나비를 잡으려 뛰어다니는 두 아이를 총으로 쏴 죽였다. 제멋대로 하지 말라는 경고를 미군은 아이들을 죽이는 일로 내보인 것이다. 어른들은 술렁댔지만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다. 미군이 아니면 인민군을 선택해야 했다. 인민군을 피해가는 길에 미군과 대립할 수는 없었다.

 

다시 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미군이 건너편 철길 위로 사람들을 몰았다. 철길 위에서 미군은 사람들 짐을 검사할 뿐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 미군들이 갑작스레 호각을 불어대며 산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들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미군들이 숲속으로 몸을 감춘 순간 하늘에서 전투기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그와 함께 여기저기로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은실이도 아버지 손에 이끌려 달리다가 시체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검은 먼지가 자욱한 상황에서 은실은 이리저리 뛰다가 그만 아버지 손을 놓치고 말았다. 은실은 사람들 뒤를 따라 철도 밑에 있는 배수구로 몸을 피했다. 배수구에 폭탄이 떨어졌는지 굉음과 함께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당시 전투기는 미군을 상징하는 전쟁무기와 같은 것이었다. 양민들을 인솔하는 미군이 숲속으로 피하자 전투기는 길거리에 있는 양민들을 향해 포탄을 퍼부었다. 양민 학살이 계획적으로 벌어졌다는 얘기다. 미군은 왜 이런 일을 저지른 것일까? 마을에 남은 양민들이 인민군에 휩쓸려 동조하는 상황을 미리 방지하려고 한 것일까? 배수구 안에서 은실은 다행히 아버지를 만난다. 총에 맞았는지 아버지 다리에는 핏물이 흥건했다. 배수구 입구까지 온 미군들이 호각을 불며 사람들을 밖으로 내몰았다. 사람들은 이제 미군을 믿지 않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미군을 따라가도 죽을 테고, 미군을 따라가지 않아도 죽을 것이다.

 

미군은 살아남은 이들을 다시 철길로 내몰았다. 은실은 철길로 올라가다가 시체더미 속에서 동생인 인국을 보았다. 소리를 지르고 싶은데 입속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시체, 목이 달아난 시체가 길가에 흩어져 있었다. 은실은 다리를 절뚝이는 아버지 손을 잡고 시체를 넘고 넘어 길을 걸었다. 미군은 사람들을 노근리 쌍굴로 이끌었다. 굴에는 이미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이 얼추 굴 안에서 자리를 잡자마자 미군들을 굴을 향해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위협사격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총에 맞아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피난지가 죽음터가 될 판이었다. 주곡리에 사는 유일한 대학생이 미군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군은 흰 옷 입은 사람들이 무리지어 있으면 무조건 사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했다. ‘흰 옷 입은 사람들은 조선인을 가리킨다. 미군은 피난이라는 명분을 세워 마을 사람들을 죽음터로 내몰았다. 인민군을 피해 피난을 떠난 사람들은 이렇게 미군의 총칼 아래 속절없이 무너졌다. ‘죽음의 굴로 떠난 피난길에서 은실 또한 엄마를 잃었고, 동생들을 잃었다. 언니 금실은 나중에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할머니는 팔에 총을 맞았고, 아버지는 다리에 총을 맞았다. 한마디로 은실네 집안은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나버렸다.

 

은실네 집안만 이런 게 아니다. 은실이 친구인 수옥은 눈 하나를 잃었고, 손가락 다섯 개를 잃은 아이도 있었다. 은실이가 좋아한 현수 오빠네는 피난처에서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인민군이 쌍굴에 도달하기까지 미군은 줄기차게 쌍굴 안으로 총탄 세례를 퍼부었다. 미군이 총을 쏘면 사람들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총알이 피해가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총을 쏘는 이들이나 총알 세례를 받는 이들이나 왜 총을 쏘고 왜 총을 맞아야 하는지 물을 겨를이 없었다. 하긴 이것이 바로 전쟁이다. 전쟁은 삶과 죽음에 대해 묻지 않는다. 운이 있으면 살고 운이 없으면 죽는다. 전쟁의 신은 결코 사방을 둘러보며 자비를 베풀지 않는 것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죽음의 굴에서 살아남은 은실이는 할머니와 함께 그리던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와 동생인 인국이 죽었고, 언니인 금실과 막내인 홍이는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모른다. 굴을 먼저 빠져 나간 아버지도 소식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다행히 은실이 살던 집은 불에 타지 않고 온전한 채로 남아 있다. 일곱 식구가 집을 떠났는데, 두 사람만이 돌아왔다. 살아남았으니 된 거 아니냐고? 집으로 돌아온 첫 밤에 은실은 악몽을 꾼다. 총알이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길가에 은실이 혼자 서 있다. 도망치려고 해도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몸에서는 식은땀이 흐른다. 은실은 온몸을 비틀다가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어난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다.

 

어둠 속에서 은실은 엄마를 부른다. 대답이 없다. 아버지를 부른다. 역시 대답이 없다. 은실은 코를 골며 자는 할머니를 흔들어 깨워서는 엄마 소식을 묻는다. 엄마는 총 맞아 죽지 않았느냐고 할머니가 일깨워준다. 등에 총을 맞고 고통스러워하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라 은실은 할머니 품으로 파고든다. 살아남은 사람은 죽은 자를 기억한다. 관념으로 기억되는 게 아니다. 감각으로 기억된다. 은실의 뇌리에는 죽기 직전 엄마의 끔찍한 모습이 이미지로 새겨져 있다. 엄마를 생각할 때마다 은실은 이 모습을 먼저 떠올린다. 게다가 은실은 인국의 시체까지 보았다. 어린아이 혼자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은실은 온몸으로 겪고 있는 것이다.

 

사흘이 지난 날 아침, 할머니는 엄마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노근리 쌍굴로 갈 차비를 한다. 쌍굴이라는 말만 들어도 은실이는 온몸을 떤다. 팔을 다친 할머니 혼자서 시신을 수습할 수는 없다. 마지못해 은실은 할머니를 따라나선다. 미군이 사라진 자리에는 인민군이 들어섰다. 인민군이 미군을 대신했지만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없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인민군이 내준 통행증을 들고 은실은 할머니와 함께 노근리로 발걸음을 옮긴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살아 있던 엄마의 시신을 수습하러 떠나는 길이다. 은실은 며칠 사이에 벌어진 일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도대체 이런 일이 왜 벌어진 것일까?

 

죽은 자는 움직일 수 없으니 살아남은 사람이 움직이며 뒷수습을 해야 한다. 때는 7월 말 한여름이다. 그냥 있어도 땀이 나는 날씨에 은실은 썩은 시체들이 즐비한 굴에서 엄마 시신을 찾고 있다. 산 자들이 거두지 않으면 죽은 자들은 이 자리에서 이대로 썩을 것이다. 한 맺혀 죽은 것도 서러운데 죽어서 갈 곳조차 없는 영혼이라니. 전쟁은 죽은 자만 죽음 속으로 밀어 넣은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도 죽음 속으로 밀어 넣는다. 죽은 자는 슬픔을 모르지만, 살아남은 자는 죽은 자의 슬픔까지 온몸으로 떠안아야 한다. 정확히는 죽은 자의 몫까지 떠안고 살아야 한다. 어린아이가 감당해야 할 운명치고는 참으로 얄궂지 않은가.

 

산자락에 엄마를 묻고 은실과 할머니는 집으로 돌아온다. 집 뒷산에 무덤을 만들고 싶지만, 두 사람 힘으로는 무리다. 굴에 방치된 채로 있는 것보다는 그래도 나으니 두 사람은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엄마 시신을 수습했는데도 은실은 여전히 악몽을 꾼다. 문 밖에서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 달라나가면 아무도 없다. 죽은 엄마가 돌아올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은실은 무서운 전쟁이 끝나면 엄마가 살아 돌아올 것만 같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게 있는 법이다. 은실에게는 엄마가 그렇다. 아니, 언니 금실이가 그렇고 동생들인 인국이와 홍이가 그렇다.

 

죽은 엄마가 그리운 은실이 악몽을 꾸어도 시간은 어김없이 흐른다. 흐르는 시간을 살아내려면 사람들은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야 한다. 장대비에 쓰러진 벼를 세우는 일도 은실이와 할머니가 해야 할 일이다. 예전 같으면 아버지가 책임 질 몫을 이제는 은실이가 감당해야 한다. 장대비에 쓰러진 벼를 세우고 집에 돌아온 은실이 눈에 거지꼴을 한 여자가 보인다. 뒤따라 들어온 할머니가 그 여자를 보더니 금실이가 아니냐고 소리친다. 금실이가 맞다. 죽은 줄 알았던 언니가 살아서 돌아왔다. 꾀죄죄한 포대기를 두르고 있는데, 포대기로 감쌌을 홍이는 보이지 않는다. 홍이는 어찌 된 것일까? 그리고 금실이는 어떻게 살아 돌아온 것일까?

 

그런데, 금실이가 이상하다. 할머니를 보고도, 은실이를 보고도 전혀 모르는 사람인 듯 대한다. 눈도 멍하니 풀려서 초점이 없다. 몸은 살았는지 몰라도 금실은 정신을 저 멀리로 내던진 채로 집에 돌아왔다. 금실이 집에 돌아오는 과정을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작가 또한 이 상황을 굳이 말하지 않는다. 금실은 엄마가 불러주던 자장가만 기억한다. 엄마가 금실과 은실에게 불러준 자장가를 금실은 홍이를 어르며 불렀다. 정신이 나간 금실은 아침에 잠에서 깨면 베개를 포대기에 감싸 업고 자장가를 부른다. 홍이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을 견디지 못한 것일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이토록 끈질기게 금실의 몸과 마음을 옥죄고 있는 셈이다.

 

은실은 정신이 나가 제 한 몸 챙기지 못하는 언니가 창피하다. 왜 그러지 않겠는가? 은실 또한 제 한 몸 챙기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팔을 다친 할머니를 대신해 이런저런 집안일을 스스로 해야 한다. 악몽을 꾸는 통에 잠을 제대로 잘 수도 없다. 이런 와중에 백치가 된 언니까지 돌보아야 하니 은실이 마음이 오죽할까. 때가 되면 밥을 먹고 때가 되면 학교에 다니던 아이가 죽음의 굴을 다녀오고 나서는 지독한 현실과 맞닥뜨렸다. 은실에게 전쟁은 원래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학교 선생님은 미군이 인민군을 금방 몰아낼 것이라며 아무렇지 않게 전쟁을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전쟁이 지금 은실의 삶을 극단으로 몰아간다.

 

마음 깊이 새겨진 슬픔이 몸에도 영향을 미친 것일까? 어느 날 은실은 말을 잃어버린다. 말을 하려고 해도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다. 슬픔은 연달아 온다고 하던가. 엄마와 아버지, 동생들을 잃은 것도 서러운데, 이제는 목소리마저 잃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생사조차 몰랐던 아버지가 살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은실에게 식구들 소식을 먼저 묻는다. 식구들 모두 무사하냐는 아버지 말에 은실은 그저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다. 20여 일 만에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다음 날 끊어진 철길을 보수하는 일에 동원되었다. 총에 맞아 다리를 다쳤지만, 일손이 부족한 인민군들은 아버지를 억지로 끌고 갔다. 인민군이 지배하는 세상이라고 해서 특별히 나아진 게 없다. 없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제 뜻대로 살기는 힘든 모양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부엌에서 밥을 먹던 은실이 이건 엄마 밥, 이건 인국이 밥, 이건 홍이 밥이라고 말하며 울먹이는 대목이다. 추수 때가 다가오면 으레 양식이 모자라기 마련인데, 이 가을에 은실은 배를 곯지 않는다. 엄마와 인국과 홍이가 먹을 밥을 자신이 먹고 있기 때문이다. 식구들과 밥을 나누어 먹고 싶어도 이제는 그럴 수 없다. 살아남은 사람은 죽은 사람을 쉬이 떠나보내지 못한다. 시간이 약이라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그것은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효과가 생기는 약일 따름이다. 시간이 흐르면 은실은 정말로 이 아픔을 잊게 될까? 마음 깊이 새겨진 아픔을 잊고 마음껏 웃을 날을 맞이할 수 있을까?

    

그래도 삶은 다시 시작되고

 

인민군이 마을에서 후퇴했다. 미군과 국군이 마을에 들어오면 인민군에 협조한 사람들을 그냥 놔두지 않을 거라는 소문이 퍼진다. 이래나 저래나 죽어나는 건 양민들이다. 총칼을 들이밀고 협박을 하는데 어떻게 협조하지 않을 수 있는가? 전시 상황에서는 아군과 적군만 존재한다. 총을 든 군인들이야 아군과 적군을 구분할 테지만, 양민들이 어떻게 아군과 적군을 구분한단 말인가? 인민군이 철수한 후 마을에 들어온 경찰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빨갱이를 도와주는 이들은 자수하라고 외친다. 은실이 아버지는 파괴된 철도를 복구하는 일에 끌려 나가 일을 했다. 살기 위해 아버지는 인민군을 도왔다. 경찰은 아버지처럼 힘없는 사람들이 처한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다. 앞서 말한 대로, 전시에 적군을 도와주면 곧바로 적군이 되기 때문이다.

 

경찰은 은실이 아버지를 비롯해 자수한 사람들을 트럭에 태워 어딘가로 데려갔다. 미군이 들어오면 미군이 사람들을 끌어가고, 인민군이 들어오면 인민군이 사람들을 끌어간다. 경찰이 들어오면 경찰이 또 사람들을 끌어가는 이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은실은 도대체 뭘 잘못했다고?”(170)라고 외치며 울부짖는다. 전쟁이 벌어지면 힘이 없는 사람들만 죽어나간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자기 혼자 살겠다고 한강 다리를 끊고 남쪽으로 도망갔다. 권력자는 힘없는 백성을 돌보지 않는다. 백성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민주주의라는 말을 권력자는 절대로 신봉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그저 권력을 낳는 도구일 뿐이다.

 

경찰에 끌려간 아버지는 곧바로 전쟁터에 끌려갔다. 인민군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인민군이 되고, 경찰(국군)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국군이 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애초부터 아버지와 같은 사람들이 이념이니 하는 것을 알 리가 없다. 미군이 왜 남한을 도와 북한과 싸우는 지 알 리 없고, 소련이 왜 북한 편을 드는지 알 리도 없다. 그들은 인민군이 들어오면 인민군을 위해 일을 하고, 국군이 들어오면 국군을 위해 일을 한다.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국군이 물러가면 인민군이 국군을 도운 사람들을 처단하고, 인민군이 물러나면 국군이 인민군들을 도운 사람들을 처단한다. 살기 위해 벌인 일로 해서 힘없는 사람들은 맥없이 죽어나간다.

 

은실이가 계속해서 악몽을 꾸자 할머니는 염장이를 불러 죽은 식구들의 가묘라도 만들려고 한다. 엄마를 가매장한 무덤을 끝내 찾지 못해 할머니는 식구들이 입던 옷을 무덤 속에 묻는다. 살아남은 자들은 살아남았기에 할 일이 있다. 무엇보다 죽은 이들을 장사지내야 한다. 한 맺혀 죽은 이를 길거리에 버려두고 어떻게 살아남은 이들이 남은 일상을 보낼 수 있을까? 이렇게 가을이 가고 겨울이 가고, 해가 지나 다시 봄이 온다. 학교가 문을 열었지만, 여전히 말을 못하는 은실은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힘들다. 눈 하나를 잃은 친구 수옥이 먼저 학교를 그만두고 은실 또한 이내 학교를 그만 둔다. 해가 바뀌었어도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전쟁터에 끌려간 아버지에게는 아무런 소식도 없다.

 

다시 여름이 왔다. 전쟁이 일어난 지 일 년이 지난 것이다. 돌려 말하면, 일 년 전에 죽은 식구들의 첫 제삿날이 돌아왔다. 노근리 굴속에서 겪은 일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버렸다. 아이들 앞에서 이를 얘기한 학교 선생님은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경찰들에게 끌려갔다. 권력은 노근리의 진실을 어떻게든 감추려고 한다. 힘이 없는 사람들은 가슴에 한을 품은 채 죽은 이들의 넋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낸다. 은실네는 시체를 찾지 못해 식구들이 입던 옷을 땅에 묻는 것으로 장례를 치렀다. 제사 준비를 하는 며칠 동안 금실은 베개를 등에 업지도, 자장가를 부르지도 않았다. 시무룩한 얼굴로 방을 쓸고 닦았고, 나물도 다듬었다. 정신이 온전해지지는 않았지만, 제 몫의 일은 해냈다.

 

제사를 지낸 다음 날 금실이 사라진다. 다음 날 밤중까지 은실은 금실을 찾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지만 금실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조바심에 울음을 터뜨린 할머니가 노근리 굴을 입에 담는다. 노근리에서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금실이 거기에 갔을 리 없다고 은실은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은실은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든다. 다음 날 새벽 은실은 쌍굴을 향해 길을 나선다. 금실은 과연 쌍굴에 있었을까? 가마니때기에 덮인 채로 그녀는 굴 맞은편에 누워 있었다. 가마니때기 사이로 삐져나온 낯익은 발을 보고 은실은 비명을 내질렀다. ‘금실이 언니라는 소리가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엄마와 동생들을 잃으면서 말을 잃은 은실은 언니 금실을 잃으면서는 말을 되찾는다. 지독한 슬픔이 말을 잃게 했고, 동시에 지독한 슬픔이 말을 찾게 했다. 비명과도 같은 말인 금실이 언니!”를 내지르며 은실은 집으로 달려갔다. 죽음에 대해 생각을 하기도 전에 은실은 엄마와 동생들을 잃었다. 시간이 흘러 그 아픔을 조금은 추스를 수 있게 되었을 때, 은실은 언니인 금실을 잃었다. 살아남은 은실은 이제 금실의 몫까지 짊어져야 한다. 금실은 왜 이리 허무하게 생을 마쳤을까? 첫 제사를 치르면서 기억이 떠오르기라도 한 것일까? 은실도 견디는 삶을 왜 언니인 금실은 견디지 못하느냐고 묻지 말라. 은실이 제 몫의 삶을 살고 있듯, 금실 또한 제 몫의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금실은 기억을 아예 지움으로써 남은 삶을 살려고 했다. 돌려 말하면 기억이 떠오르는 순간 금실은 더 이상 자기 삶을 유지할 수 없다. 은실은 쌍굴에서 일어난 끔찍한 기억을 잊지 않았다. 잊기는커녕 그녀는 친구인 수옥에게 천 년이 흘러도 이 일을 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굴속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바깥사람들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으면 누가 알릴까? 금실은 그르고 은실은 옳다고 굳이 생각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진실은 살아남은 이들의 입을 통해 사회에 알려진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진실을 말함으로써 은실은 금실이 되고 엄마가 되고 인국이 되고 홍이가 된다. 삶과 죽음을 하나로 묶는 경계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엄마가 죽어도, 동생들이 죽어도, 언니가 죽어도 살아남은 은실은 살아야 한다. 할머니도 살아야 하고, 아버지도 살아야 한다. 전쟁은 3년 만에 끝났다. 정확히 말하면, 종전(終戰)이 아니라 휴전(休戰)이 되었다. 아버지는 살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누군가가 죽은 자리를 누군가가 살아서 채운다. 은실이 반대하는 데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아버지를 새장가 들이려고 한다. 죽은 엄마가 불쌍하지 않느냐는 은실이 말에 할머니는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말로 대꾸한다. 전쟁 통에 남편을 잃은 여인과 아버지는 재혼을 한다. 새엄마는 8살 먹은 딸 하나를 데리고 은실네 집으로 들어왔다. 엄마 자리와 동생 자리가 다른 사람들로 채워진 것이다.

 

죽은 식구들이 불쌍한 은실은 쉬이 마음을 열지 못한다. 새 식구를 받아들이려면 옛 식구를 잊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집 밖으로 맴돌기만 하던 은실은 동생인 단비와 눈사람을 만들면서 비로소 마음을 열게 된다. 새엄마와 단비가 싫은 게 아니다. 은실의 마음 깊은 곳에는 죽은 식구들에 대한 죄책감이 스며들어 있다. 살아남은 사람이라면 어김없이 받아들여야 할 숙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새 식구를 맞이했다고 해서 옛 식구를 잊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새 식구는 새 식구이고 옛 식구는 옛 식구일 뿐이다. 새 식구와 새로운 추억을 쌓는다고 해서 옛 식구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바로 삶이다.

 

새엄마가 아들을 낳으면서 이 소설은 끝난다. 은실에게 또 한 명의 동생이 생긴 것이다. 아기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자 은실이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마음이 복잡했다. 아기 울음소리가 반갑고 기쁘면서도, 죽은 식구들이 이 집에서 밀려난다는 생각에 섭섭하기 그지없었다.”(224) 새 식구가 태어난 만큼 죽은 식구들이 설 자리는 좁아지지 않을 수 없다. 기쁘면서도 슬픈 이 복잡한 마음을 은실이 이해하려면 시간이 더 흘러야 한다. 산 자는 산 자와 더불어 살아야 한다. 이 말을 한 맺혀 죽은 이들은 잊어야 한다는 말로 들어서는 안 된다. 죽은 자를 위해서라도 산 자들은 살아야 한다. 살아서 진실을 밝혀야 한다. 진실을 품고 있는 한, 산 자는 언제나 죽은 자와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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