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론> 기형도의 「빈집」을 읽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나,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기형도, 「빈집」
사랑을 잃은 사람이 글을 씁니다. 어떤 글일까요? 사랑을 잃었으니 연애편지가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자신을 떠난 사람을 원망하는 글을 그는 쓰고 있을까요? 이미 떠난 사람을 원망한들 무엇이 달라질까요? 그럼, 사랑을 잃고 방황하는 자신을 자책하는 글일까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 잘해주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럴 듯도 싶습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을 글로 표현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가 쓰는 글을 사랑하는 사람은 읽지 못할 테니까요. 그가 쓰는 글은 독자가 없는 글이라는 얘기입니다.
읽는 사람이 없는 글을 그는 왜 쓰려고 하는 것일까요? 사랑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잃은 사람이 글을 씁니다. 사랑을 잃은 눈으로 그는 사물을 봅니다. 사랑을 잃은 눈으로 보는 사물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던 시간을 그는 지금 혼자 보냅니다. 가슴이 저립니다. 혼자서 남아도는 이 시간을 보낸다는 게 참으로 끔찍합니다.
시인은 “짧았던 밤들”에 작별인사를 고합니다.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에도 작별 인사를 고합니다. 그에게 밤은 왜 그리 짧았을까요? 그녀와 밤 시간을 보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밤만 되면 그를 찾아오는 삶의 고뇌 때문이었을까요? 시간에 작별을 고하는 걸 보면 그는 아무도 모르는 어딘가로 떠날 준비를 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을 잃고 글을 쓰는 사람은 어디로 떠나려고 하는 것일까요? 그곳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이 없는 곳인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시인은 익숙한 것들과 작별을 고함으로써 익숙하지 않은 세상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글을 씁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을 안타깝게 부르며 글을 씁니다. 글을 쓰는 건 자기를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생각 없이 글을 쓸 수는 없으므로 글쓰기는 곧 자기 생각을 외부로 표현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습니다. 어딘가로 떠나려는 사람이 글쓰기로 자기가 산 흔적을 남기는 건 모순이 아닌가요? 시인은 자기를 숨기려는 욕망과 자기를 표현하려는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습니다.
숨기려는 욕망과 표현하려는 욕망이 만나는 자리에 글쓰기가 있습니다.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에 암시된 대로, 시인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는 ‘지독한 욕망’에 휩싸여 있습니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시인은 왜 굳이 표현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가뜩이나 시인은 사랑을 잃은 상황이 아닌가요. 사랑을 잃은 슬픔을 안은 채 시인은 흰 종이가 내뿜는 공포와 마주합니다. 공포는 감각을 마비시킵니다. 움직이려 해도 몸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몸만 그런 게 아니고 정신 또한 그렇습니다. 정신이 마비되었는데 글을 쓴다고요? 시인은 스스로는 어찌할 수 없는 욕망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에게 글쓰기는 운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글을 쓰기 위해 사랑을 잃었다고 말하면 어떨까요? 흰 종이에서 피어오르는 공포와 마주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했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이리 보면 글쓰기는 단순한 유희가 아닙니다. 글쓰기는 목숨을 내놓고 자기와 맞서는 일입니다.
시인이 들여다보려고 하는 자기는 과연 무엇일까요? 글쓰기의 공포에 빠진 주체일까요? 사랑을 잃고 글을 쓰는 주체일까요? 그도 아니면 시간을 향해 미리 작별을 고하는 주체일까요?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을 시인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무엇을 망설인 것일까요? 자기를 표현하려는 욕망일까요? 표현할 수 없는 것은 표현하지 말아야 한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을 따라서 그는 다만 눈물로 제 마음을 표현할 것일까요?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에도 작별을 고하는 걸 보면 시인이 글쓰기를 통해 나아가려는 지점이 어디인지 어렴풋이나마 짐작됩니다. 그는 사랑을 비롯한 모든 욕망과 작별을 하려고 합니다. 욕망과 작별을 한다고요? 그게 가능하기나 한가요. 현실을 사는 주체라면 물론 가능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쓰는 주체’가 되어 스스로 빈집에 갇힙니다. 빈집에서라면 자기를 괴롭히는 그 지독한 욕망들과 작별할 수 있을 거라고 그는 생각합니다. 사랑을 잃은 사람=시인은 그래서 글=시를 씁니다.
사랑을 잃고 글을 쓰는 존재는 스스로 장님이 됩니다. 장님은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장님이 된 시인은 더듬거리며 바깥과 이어진 문을 잠급니다. 빈집은 이제 완벽하게 막힌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당연히 밤과 낮이 없습니다. 시간이 없는 세계에 겨울 안개가 있을 리 없고, 흰 종이도 있을 리 없습니다. 장님이 되어 빈집에 갇힌 시인은 드디어 삶의 고통=욕망으로부터 벗어난 것일까요?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라는 결구가 눈에 띕니다. 빈집에 갇힌 건 “가엾은 내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내 사랑을 가엾게 생각하는 주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전히 글을 씁니다. 장님이 된 사람은 빈집에 제 사랑을 가둬놓고 글을 씁니다. 글을 쓴다는 건 이미 욕망 속으로 빠져들었다는 얘기가 아닌가요? 이리 보면 이 시에 나오는 “빈집”은 정말로 비어있는 집이 아닙니다. “가엾은 내 사랑”을 가둔 집이 어떻게 빈집이 될 수 있을까요? 욕망은 이토록 질기게 사랑을 잃고 글을 쓰는 이에게 들러붙습니다. 사랑을 잃은 사람은 지금도 빈집에서 사랑을 잃은 공포를, 아픔을 곱씹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