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다시 한 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어느 한 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 속 깊은 곳에서 쑥국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 문밖에 섰나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내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 박철,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시는 일상 속에서 일상 너머를 노래한다. 일상을 언어로 바꾸어도 좋다. 일상을 살지 않으면서 어떻게 일상 너머를 꿈꿀 수 있을까? 누구나 사는 일상 속에서 시인은 아무나 들여다볼 수 없는 시적 순간과 만나려고 한다. 시적 순간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사물이 내보이는 진실을 온몸으로 느낄 때 비로소 시적 순간이 펼쳐진다. 박철이 지은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는 제목에 나타나는 그대로, 일상이 시적 순간으로 변하는 지점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아내가 시인에게 막힌 하수도를 뚫은 노임 4만원을 영진설비에 갖다 주라는 심부름을 시킨다. 시인은 두 번이나 길을 나섰지만 영진설비 아저씨에게 그 돈을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자전거를 타고 나선 첫 번째 길에서는 삼거리를 지나다가 굵은 비를 맞았다. 럭키슈퍼 앞에서 비를 피하다가 시인은 그만 병맥주를 마셨다. 그게 끝이었다.
역시 자전거를 타고 나간 두 번째 길에서 시인은 화원 앞에 동그마니 홀로 서 있는 자스민 한 그루에 눈이 꽂혔다. 지나치지 못하고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를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스민을 집에 갖다 놓고 영진설비에 가면 되지 않았느냐고? 맞다. 일상의 논리로는 그렇게 해야 한다. 하지만 시인은 시의 논리로 산다. 시의 논리에 빠진 시인은 다른 일을 하지 못한다. 술을 마실 때는 그저 술을 마셔야 하고, 자스민 향기를 맡을 때는 그저 자스민 향기를 맡아야 한다. 한번 꽂힌 일에 몰입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일상을 중시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지만, 시인은 어쩔 수가 없다. 실제로 그 일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으니까.
기다리다 못한 영진설비 아저씨가 집에 찾아와 아내에게 거친 몇 마디를 내뱉었다. 아내는 분명 시인에게 돈을 갖다 주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시인은 그 일을 하지 못했다. 시인을 보는 아내의 눈이 고울 리가 없다. 시인은 어떤 반응을 내보였을까?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라고 시인은 쓰고 있다. 시인은 별다르게 할 말이 없다. 비 오는 날에는 술에 꽂혀서, 다른 날에는 향기 나는 나무에 꽂혀서 영진설비에 가지 못했다고 어떻게 말하랴. 설사 말한다고 해도 일상을 중시하는 아내가 이해하기나 할까? 시인은 그래서 아이의 고운 눈썹을 들여다본다. 단순히 이 순간을 피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시인은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어느 한 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다고 생각한다. 비 오는 날에 술을 마시면서 시인은 그 무엇을 생각했고, 자스민 향기를 맡으면서 시인은 또한 그 무엇을 생각했다. 그래도 그 무엇에 대한 뚜렷한 답은 나오지 않는다. 일종의 화두(話頭)와 같은 그 무엇을 꿰뚫으려면 보이는 것과는 다른 무엇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오늘도 시인은 숲 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쑥국새 소리를 듣는다. 내리는 비를 맞으며 홀로 서 있는 향기 잃은 나무도 본다.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한다. 저마다 지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 시인은 무엇을 해야 하나? 영진설비에 다시 돈을 갖다 주어야 하나? 일상에서는 뚜렷한 답이 나오는 일인데도 어째서 시적 논리로 따지면 답이 나오지 않는가?
“내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라는 구절로 시인은 시를 맺는다. 주변에 보이는 그 무엇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영진설비에 가면 쉬이 해결될 일이다. 하지만 시인은 정말로 이 일이 어렵다. 엄마 심부름을 갔다가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빠진 아이를 보는 것 같다. 아이는 하나만 생각한다. 하나에 빠져 다른 것을 저 멀리로 내쳐버린다. 시인이 지금 이렇다. 밖을 나가면 시인은 주변에서 밀려오는 ‘시적 순간’에 눈을 뗄 수가 없다. 갑작스레 내리는 굵은 비를 보고 어떻게 술을 마시지 않으며, 두 눈을 사로잡은 자스민 한 그루를 어떻게 모른 척 지나갈 수 있을까? 그것은 숲 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쑥국새 소리를 외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 모든 것들에 눈을 감은 채 영진설비에 가면 시인은 결코 시를 쓸 수 없다. 일상의 논리로는 따질 수 없는 시의 논리가 참으로 절묘하게 표현되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