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길과 예술의 길
- 김동식 소설 <회색 인간>
밑바닥까지 추락한 인간
인간이란 존재가 밑바닥까지 추락하면 어떤 모습을 띠게 될까? 김동식은 밑바닥까지 내려간 인간을 ‘회색 인간’이라고 표현한다. 소설 ?회색 인간?에서 작가는 인간의 삶에서 예술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 밀도 있게 접근하고 있다. 먹고 사는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예술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그런 상황에서도 예술을 하는 인간이 과연 나타날까?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더불어 던질 수 있다. 자본주의는 생산에 참여하지 않는 인간을 무시한다. 자본의 목적은 증식에 있다. 지금보다 더 많은 자본을 증식하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쉬이 망할 수밖에 없다. 자본이 필요해서 자본을 증식하는 게 아니다. 자본이 증식되지 않으면 자본주의가 돌아가지 않는다. 자본을 증식하는 이유가 곧 자본에 있는 악순환이 펼쳐지는 것이라고 보면 좋겠다.
어느 날, 대도시에 사는 만 명의 사람들이 땅속 세계로 끌려간다. 땅속을 지배하는 지저 세계 인간들은 지상 인류를 한순간에 멸망시킬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지저 세계가 꽉 찼다며 자신들이 살아갈 땅을 파라고 지상 사람들에게 외친다. 끌려간 사람들이 소리친다. 왜 자기들이 파야 하느냐고? “우리가 지상으로 진출하지 않는 대가다.”(8쪽)라고 지저 인간들은 말한다. 만 명의 사람들이 노동을 해야 지상에 남은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다. 지상 사람들이 항의했지만 지저 인간들의 능력을 당해낼 수 없다. 지저 인간이 허공을 향해 무언가를 웅얼거리면 지상 사람들은 머리를 싸매고 주저앉았다. 삼장법사가 천방지축인 손오공을 길들일 때 써먹은 방법과 같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머리를 휩싼다. 지상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땅을 파야 했다.
처음에 지상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들을 구하러 올 거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저 인간들을 죽이고 탈출을 꿈꾸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나가는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나갔다.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은 땅속 노동에 서서히 적응하기 시작했다. 말이 적응이지 사실은 체념이었다. 지저 인간들은 지상 사람들에게 곡괭이 하나만 제공했다. 음식물은커녕 마실 물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다. 당연히 먹을 것도 형편없었다. 지저 인간들은 진흙 맛이 나는 빵을 지상 인간들에게 주었다. 맛도 전혀 없었지만, 문제는 그 양이었다. 끔찍한 환경 속에서 힘든 노동을 하는 와중에도 지상 인간들은 늘 배고픔과 싸워야 했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다. 그들은 노동을 할 때가 되면 노동을 했고, 잠을 잘 시간이 되면 잠을 잤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상 사람들의 얼굴은 점점 회색으로 변했다. “그것이 흩날리는 돌가루 때문인지, 암울한 현실 때문인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무표정한 회색 얼굴로 하루하루를 억지로 살아가고 있었다.”(10쪽) 죽어나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다쳐서 죽고, 병들어 죽고,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굶어죽는 이들이 훨씬 많았다. 진흙 빵 쪼가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다가 죽는 이들도 있었다. 굶주림을 참지 못한 사람들이 나무로 된 곡괭이 자루를 갉아먹었다. 다음 날을 위해 조금씩 조금씩 갉아먹었다. 자기 곡괭이 자루를 훔쳐 먹은 사람을 곡괭이로 찍어 죽이는 사내도 있었다. 이들은 먹는 것 이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먹어야 그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예술의 기원
몇 년이 흘렀을까, 만 명의 사람들은 이제 절반으로 줄었다. 이즈음 지상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지키는 규칙 하나가 정해졌다. 땅을 많이 판 사람이 우선적으로 빵을 먹는 것이었다. 약육강식의 원리냐고? 아니다. 희망 때문이었다. 지저 인간들은 도시 하나만큼의 땅을 파면 지상으로 돌려보내준다고 약속했다. 지상으로 돌아갈 방법은 땅을 파는 일뿐이었다. 땅을 많이 파는 사람이 이 난관을 극복할 영웅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희망을 마음에 품고 사람들은 묵묵히 땅을 팠다. 땅 파는 일이 끝나면 사람들은 잠을 자기 바빴다. 다른 것을 할 겨를이 없었다. 무언가를 계획하며 땅을 판 게 아니었다. 땅을 파야 했기에, 몸이 그렇게 적응되었기에 그들은 땅을 팠다.
이곳의 인간들에게 삶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일어나면 땅을 파고, 하루 종일 배고파하고, 지치면 잠을 자고, 다시 일어나면 땅을 팠다.
회색 인간들의 입은 말을 할 줄 모르는 것 같았고, 귀는 듣지 못하는 듯했고, 눈은 그저 죽어 있는 것만 같았다.
인간들을 살아 있는 송장이라고 표현하기에도 아쉬웠다. 이곳을 무의미의 지옥이라고 부르기에도 아쉬웠다. (13쪽)
이런 무의미의 지옥에서 어느 날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땅을 파는 일 말고는 아무런 사건이 없는 이곳에서 한 사내가 한 여인의 따귀를 때린 것이다. 사내는 여자가 노래를 불렀다고 말했다. 노래를 부른 게 왜 문제가 되느냐고? 살아 있는 송장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았는가? 평소라면 노래를 부른 여인은 만인을 즐겁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평소와 다르다. 노래를 불러 체력을 소모하느니 그 힘으로 조금이라도 더 땅을 파는 게 맞다. 사내는 바로 그 마음으로 여자를 때렸다. 한참 만에 일어난 여자는 놀랍게도 다시 노래를 불렀다. 누군가 여자를 향해 돌을 던졌다. 비명을 지르며 여자는 땅에 쓰러졌다. 아무도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그들의 희망은 빨리 땅을 파고 지상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 희망을 방해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맞아야 했다.
여자가 따귀를 맞은 바로 그날, 한 남자는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았다. 남자는 돌멩이로 벽에다 그림을 그렸다. 도움이 되지 않는 곳에 힘을 소비하는 남자를 사람들은 증오했다. 그 힘으로 땅을 파도 모자라는 판국에 아무 쓸모가 없는 그림을 그리다니. 이 대목에서 작가는 말한다. “인간이란 존재가 밑바닥까지 추락했을 때, 인간들에게 있어 예술은 하등 쓸모없는 것이었다.”(15쪽)라고. 그러면 왜 여자는 노래를 부르고, 남자는 그림을 그린 것일까? 사람들이 던지는 돌멩이에 맞으면서도 여자는 계속해서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은 이제 돌을 던질 힘도 없었다. 무관심 속에서도 여자는 노래 부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사흘이 지나도 여인의 노랫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누군가 여자에게 빵을 건네준 것이다. 생산을 하지 않는 사람의 손에 처음으로 빵이 쥐어진 순간이다.
허겁지겁 빵을 먹은 여자는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누군가 또 빵을 주었고, 여인은 노래로 그에 화답했다. 그림을 그린 남자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한 노인이 그에게 빵을 주며 이곳에서 일어나는 비참한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달라고 했다. 먹어야 노래를 부를 수 있고, 먹어야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땅을 파는 생산만이 유일하게 노동으로 인정되는 곳에서 노래를 부르는 여인과 그림을 그리는 남자가 나타났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주는 빵을 먹으며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렸다.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자 한 청년이 지독히도 마른 몸을 일으키며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자신을 소설가로 소개한 그는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언어로 표현하겠다고 말했다. 분노에 들끓는 한 여인이 자신이 얼마나 배가 고픈지 정말로 써낼 수 있느냐고 외쳤다.
청년은 입으로 한 편의 소설을 썼다.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여인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어렸다. 여인은 청년을 향해 꼭 살아남아 이곳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외쳤다. 그리고는 제 몫의 진흙빵을 떼어 청년에게 주었다. 또 다른 여인이 청년 앞으로 나오더니 죽은 가족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남편과 자식 이야기를 줄줄이 읊었다. 말을 마친 여인은 청년에게 빵을 내밀었다. 청년은 손에 빵을 쥔 채로 여인이 들려준 이야기를 계속해서 입으로 읊조렸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다. 한 여인의 이야기는 이렇게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외우며 땅속 세계를 벗어나는 꿈을 꾸었다. 그렇다. 꿈이다. 노래를 부르는 것도 꿈이고, 그림을 그리는 것도, 소설을 쓰는 것도 사람들에게는 꿈이었다.
모든 이들의 꿈을 이야기로
이 꿈을 노래하고, 그림으로 그리고, 소설로 쓰는 순간에도 사람들은 변함없이 죽어갔다. 노래를 해도, 그림을 그려도, 소설을 써도 배는 여전히 고팠다. 그런데도 왜 이들은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고 소설을 썼을까? 더 이상 회색 인간으로 살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예술이란 그런 것이다. 돌가루가 날리는 땅속에서 회색 인간이 되지 않으려면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고, 소설을 써야 했다. 땅을 파는 일에만 집착하면 지상에 나가도 이들은 회색 인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먹고 살만하기에 예술을 하는 게 아니다. 먹을 게 없어도 인간이라면 예술을 해야 한다. 그래야 인간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생산을 중시하는 자본주의는 예술에도 자본의 논리를 적용한다. 자본의 목적은 증식에 있다고 했다. 돈이 돈을 낳는 세상을 자본주의는 만들려고 한다. 돈이 되지 않으면 자본주의 사회에 끼어들 수 없다는 말이다. 피카소가 왜 자본주의 사회의 예술적 영웅이 되었겠는가? 수천억을 호가하는 그림을 그는 그렸기 때문이다. 돈으로 예술의 가치가 판단되는 세상에서 노동을 하는 인간은 어쩔 수 회색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이 회색 인간이라는 것을 모르는 회색 인간. 모든 것을 안다고 자부하는 인간이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이 되는 역설을 어떻게 자본의 논리로 풀 수 있을까? 자본은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린다. 주변을 볼 줄 모르는 자본이 주변에서 노니는 예술가를 어떻게 이해할까?
문명이 발달하고, 먹을 것이 넘쳐난다고 회색 인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땅속 세상에도 회색 인간은 있고, 문명사회에도 회색 인간은 있다. 자본의 논리로 예술적 가치를 매기는 사람들이 회색 인간이 아니면 무엇일까? 돈이 안 되는 예술(특히 문학)은 점점 뒷방으로 밀려나는 시대에 김동식은 인간에게 예술이 필요한 이유를 이야기한다. 예술이 있어야 인간은 회색 인간이 되지 않는다. 그만큼 중요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회색 인간이 자본주의의 꽃이 된 시대에 예술을 말하는 것은 어찌 보면 무의미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예술을 이야기한다. 왜냐고? 그것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최소한의 비밀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먹고, 자고, 싸는 존재이다. 동시에 인간은 생각하고, 쓰고, 그리는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