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사나운 소 한 마리를 몰고
여기까지 왔다
소몰이 끈이 너덜너덜 닳았다
골짝마다 난장 쳤다
손목 휘어지도록 잡아끌고 왔다
뿔이 허공을 치받을 때마다
뼈가 패었다
마음의 뿌리가 잘린 채 다 드러났다
징그럽게 뒤틀리고 꼬였다
생을 패대기쳤다
세월이 소의 귀싸대기를 때려 부렸나
쭈그러진 살 늘어뜨린 채 주저앉았다 넝마같다
핏발 가신 눈 꿈벅이며 이제사 졸리는가
쉿!
잠들라 운명
- 신달자, '소'
누구나 마음속에 사나운 소 한 마리를 품고 있다. 심우도(尋牛圖), 곧 마음속 소를 찾아 길을 떠나는 이야기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마음속에 소가 있는데도 사람들은 늘 밖에서 소를 찾는다. 밖에서 찾은 소를 길들이기 위해 멍에를 들씌우기도 한다. 멍에를 씌우면 소와 친해질 수 있는 것일까? 시인은 위 시에서 “사나운 소 한 마리 몰고/ 여기까지 왔다”라고 선언한다. 소몰이 끈이 너덜너덜 닳을 정도로 시인은 참으로 힘겹게 사나운 소를 몰고 여기까지 왔다. 골짝마다 난장을 치는 소를 손목이 휘어지도록 잡아끌고 왔다. 한마디로 시인은 소와 싸움을 했다. 싸움에 졌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으리라. 돌려 말하면 시인은 사나운 소를 간신히 다스리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사나운 소를 다스리지 못하면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사나운 소를 다스린다는 것은 곧 길을 잃지 않았다는 소리다.
처음부터 사나운 소를 다스리지는 못할 것이다. 화가 난 소가 뿔로 허공을 치받는 바람에 시인은 뼈가 패이기도 했다. “마음의 뿌리가 잘린 채 다 드러났다”라는 말도 괜한 게 아니다. 마음의 뿌리가 잘리는 끔찍한 고통을 겪으면서까지 사나운 소를 다스려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래야 삶의 길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사나운 소를 길들이지 못해 울화가 치밀 때면 시인의 마음 또한 징그럽게 뒤틀리고 꼬였다. 그런 날이면 시인은 생을 패대기쳤다. 사나운 소리를 다스리는 일과는 상관없는 일을 하며 마음껏 살았다. 그러면 마음이 편해져야 하는데, 그럴수록 마음이 자꾸만 불편해졌다. 무언가 해야 할 일을 저편에 놔두고 온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사나운 소와 함부로 마주치면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자꾸만 그리로 가는 마음을 어쩔 수가 없다.
한편으로는 사나운 소와 맞서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나운 소로부터 도망치는 삶을 살며 시인은 시간을 보냈다. 마음은 늘 사나운 소와 맞서는 길을 따랐지만, 그 마음으로 일상의 뜨거운 욕망을 잠재우는 것은 참으로 어렵기만 했다. 어느 순간 사나운 소가 조금씩 진정을 하기 시작했다. “세월이 소의 귀싸대기를 때려 부렸나”라는 시구에 암시된바 그대로, 시인은 사나운 소를 길들인 세월의 힘을 비로소 느끼게 된다. 세월의 힘이란 달리 말하면 시간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을 이기는 생명이 어디에 있을까? 시간에 매여 사는 사나운 소도 결국에는 시간에 굴복하는 이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시인은 “쭈그러진 살 늘어뜨린 채 주저앉았다 넝마같다”라고 쓰고 있다. ‘쭈그러진 살’은 시간을 사는 존재의 운명을 상징할 것이다. 이로 보면 사나운 소는 길들여진 게 아니라 힘이 빠진 것이다.
핏발 가신 소의 눈에 졸음이 잔뜩 묻어 있다. 시인은 “쉿!”이라고 조용히 외친다. 곧바로 “잠들라 운명”이라는 시구가 나온다. 사나운 소는 운명을 상징한다. 운명을 길들이며 사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될까? 사나운 소를 길들이는 사람이 있듯, 운명을 길들이는 사람 또한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 시의 문맥을 보면, 시인이 사나운 소를 길들였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사나운 소 한 마리를 몰고 여기까지 왔을 뿐이다. 아직도 소와 싸우고 있다는 말이겠다. “잠들라 운명”이라는 선언은 그러므로 그 속에 역설을 내포하고 있다. 운명의 힘이 약해질지는 몰라도 완전히 잠들지는 않을 것이다. 삶을 사는 주체가 살아 있는 한, 운명 또한 그 주체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 그 운명에 휩쓸릴지 말지는 전연 그 사람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사나운 소가 약해진 것을 다만 시간 덕분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시인인 사나운 소와 싸우지 않았다면 소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더 사나워졌을 것이다. 사나운 소를 몰고 여기까지 오는 일도 불가능했을 거란 말이다. 시인은 졸음이 가득한 눈을 꿈벅이는 소를 보며 비로소 운명을 뒤돌아볼 여유를 마음에 품게 된다. 여유를 품는다고 사나운 소를 완전히 다스릴 수 있는 건 아니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인은 사나운 소와 싸울 것이고, 이전보다 더 사나운 소를 다스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려면 시인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기 욕망을 끊임없이 들여다보는 힘을 계속해서 길러야 한다. 운명에 맞서는 일이란, 시간이 흘러도 스러지지 않는 이 욕망과 맞서는 것이다. 신달자는 운명에 맞서는 시로 자기 욕망을 들여다본다. 사나운 소와 맞서는 일이 그녀에게는 곧 시작(詩作)에 해당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