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
너는 가고 있고
가면서 변신하고 있고
아무도 몰래 얼굴을 감추고 사라지면서
어디서 맑은 개울물 소리
날아다닌 꽃을 잡으러 다니는 아이들 손끝에서 하느님이 웃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심심하여
지상에 내려와 아이들과 놀아 주고 있는 것
허공 안팎을 들락거리던 나비 한 마리
네가 없는 붉은 우체통 같은 오후의 정수리에 앉아 있다
신의 지문이 묻어 있는 버드나무잎 하나
우편엽서처럼 날아와
가만히 들여다보면
햇살이 새겨 놓고 간 오돌도돌한 불립문자
더듬더듬 손끝을 타고 올라와 소곤거린다
소곤거리는 봄볕과 함께 산림문화관에서 버드나무잎 화석을 읽는다
돌과 이파리의 경계 너머
사라진 네가 숨어든 곳
유리관 안에서 모른 체하며 앉아 있는
돌도 나뭇잎도 아닌
하느님도 나비도 아닌
너였다가 너의 미래였다가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다만 지금은 황홀한 한때
- 홍일표, '화석'
가고 있는 ‘너’를 시인은 “가면서 변신”하는 존재로 표현하고 있다. 시간 속에서 변하지 않는 존재가 어디에 있을까? 몰래 얼굴을 감추고 사라지는 저 “맑은 개울물 소리” 또한 시간의 흐름을 따라 끊임없이 어딘가로 흐른다. 사방에 깔려 있는 무수한 생명들은 저마다 시간을 살고 있다. 이들이 사는 시간은 물론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날아다닌 꽃을 잡으러 다니는 아이들 손끝에서 하느님이 웃고 있다”는 시구에 나타나는 대로, 시인은 생명과 생명을 하나로 이어주는 하느님을 상상하고 있다. 시인이 상상하는 하느님을 유일신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은 생명이 있는 어느 곳에서나 존재한다. 정확히 말하면 생명 하나하나가 하느님을 품고 있다. 맑은 개울물 소리에도 하느님이 깃들어 있는 셈이다.
만물에 깃든 하느님도 가끔은 심심하여 지상에 내려와 아이들과 놀아주고는 한다. 지상에 내려온 하느님을 굳이 인격체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하느님은 인격일 수도 있고, 기운일 수도 있다. 이리저리 해석할 여지는 다분하지만, 단 하나의 의미로 해석될 수 없는 존재가 하느님이다. 허공 안팎을 들락거리던 나비 한 마리에도 하느님이 깃들어 있다. “신의 지문이 묻어 있는 버드나무잎 하나”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은 맥락을 지니고 있다. 거기에는 “햇살이 새겨 놓고 간 오돌도돌한 불립문자”가 새겨져 있다. 불립문자는 인간의 시선으로 해석할 수 없는 문자이다. 인간의 의미를 뛰어넘은 자리에 있는 문자라고 해도 좋겠다. 그런 불립문자가 “더듬더듬 손끝을 타고 올라와 소곤거린다”. 아무나 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물을 향해 귀를 활짝 연 존재들만이 이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생명이 있는 존재라면 그 속에 하느님을 품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왜 사물이 소곤거리는 소리를 누군가는 듣고, 누군가는 듣지 못하는 것일까? 사물이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다.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물에 깃든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햇살이 새겨 놓고 간 이 하느님=불립문자를 읽으려면 손끝을 타고 올라오는 느낌에 주목을 해야 한다. 하느님의 소리는 귀로 듣는 게 아니라 몸으로 듣는 것이다. 머리로 해석하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그 감촉을 느껴야 하는 것이다. 시인은 바로 이 느낌으로 버드나무잎 화석을 읽는다. “돌과 이파리의 경계 너머”에 있는 이 화석을 시인은 “사라진 네가 몰래 숨어든 곳”으로 표현한다. 겉으로 보면 유리관 안에서 모른 체하며 앉아 있는 듯싶지만, 버드나무잎 화석이 결코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다.
돌과 이파리의 경계를 넘은 화석을 따라 시인 또한 경계를 넘은 자리에서 그와 마주하고 있다. 화석은 돌도 아니고 나뭇잎도 아니다. 하느님도 아니고 나비도 아니다. 동시에 화석은 돌이고 나뭇잎이고 하느님이고 나비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이 화석을 시인은 온몸의 감각으로 느낀다. 온몸의 감각을 사용하려면 몸 깊이 숨어 있는 하느님을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 가끔은 심심한 하느님을 불러내 아이들과 더불어 놀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하느님은 쉬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우편엽서처럼 날아온 사물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존재에게만 그 모습을 나타낸다. 아무 때나 드러날 하느님이라면 구태여 사물의 소리를 듣는 귀를 만들 필요가 없지 않은가?
“다만 지금은 황홀한 한때”라는 시구에 표현된바, 마음속 하느님과 노니는 이 시간은 지금 이 순간에 이루어진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존재가 아무 때나 나타날 리 없지 않은가. 시인의 입장에서 보면 황홀한 한때는 시적 순간이 펼쳐지는 현재를 의미한다. 시적 순간은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지금 현재로 표현된다. 이 순간을 놓치면 하느님은 저 멀리로 사라지고, 동시에 시적 순간 역시 허망하게 허물어진다. 시인은 “너였다가 너의 미래였다가”라는 시구로 현재 속에서 펼쳐지는 수많은 시간들을 포괄한다. 시간을 사는 하느님은 시간 속에서 시간을 넘어선다. 시간을 살기에 하느님은 모든 것이 될 수 있고, 시간을 넘어서기에 하느님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수 있다. 홍일표는 모든 것이자 아무것도 아닌 하느님을 통해 시적 현재로 들어가는 순간을 열어젖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