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술값은 쟤들이 낼 거야
옆 자리 앉은 친구가 귀에 대고 소곤거린다
그때 나는 무슨 계시처럼
죽음을 떠올리고 빙긋이 웃는다
그래 죽을 때도 그러자
화장실 가는 것처럼 슬그머니
화장실 가서 안 오는 것처럼 슬그머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할 것도 없어
빗돌을 세우지 말라고 할 것도 없어
왁자지껄한 잡담 속을 치기배처럼
한 건 하고 흔적 없이 사라지면 돼
아무렴 외로워지는 거야
외로워지는 연습
술집을 빠져나와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 걸으며
마음이 비로소 환해진다.
- 윤재철,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시 제목에 나오는 ‘갈 때’는 죽을 때를 말한다. 시인은 술자리에서 친구에게 들은 말을 통해 죽음에 대한 시적 사유를 시작한다. 옆 자리에 앉은 친구가 시인에게 말한다.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라고. 술값 걱정을 하지 말라는 소리다. 지극히 일상적인 이 말에서 시인은 “그때 나는 무슨 계시처럼/ 죽음을 떠올리고 빙긋이 웃는다”. 생명으로 태어난 존재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는 있을 수 없다. 살아 있는 존재는 죽음을 체험할 수 없다. 간혹 죽음을 체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을 확연하게 증명할 방법은 없다. 죽음이란 저편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편에 있는 사람들은 죽어야 저편으로 갈 수 있다. 죽음을 알려면 일단 저편으로 가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이미 죽은 자가 되어버린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들은 산 자로서 죽음을 알고 싶어 한다.
죽음을 사유하는 일은 그러므로 온전히 죽음을 상상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이 상상은 죽음 자체를 향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좀 더 편하게 죽는 상황을 상상한다. 구순(九旬)에 이른 부부가 잠을 자면서 저도 모르게 죽은 소식이라도 들으면 사람들은 감탄을 연발한다. 참으로 편안하게 죽은 구순 부부가 부러운 것이다. 돌려 말하면 이렇게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에 떨며 비통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갈 때’를 생각하는 시인이라고 다르지 않다. 시인은 화장실에 가는 것처럼 슬그머니 죽고 싶다. 화장실에 가는 것은 일상이다. 인간은 죽음을 일상 너머로 밀어내려고 한다. 죽는 것은 어쨌든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일상 속에서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그러려면 일상인 듯 죽음을 느껴야 한다.
이순신은 전쟁터에서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부하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을 염려한 것이다. 어느 시인은 자신의 무덤 앞에 빗돌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죽은 이후에 세워질 빗돌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렇든 저렇든 두 사람은 죽음 이후를 말하고 있다. 죽음 이후에 펼쳐질 상황이 죽은 사람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시인은 이승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사라지고 싶다.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은 사람이 무슨 유언을 남길까? 산 자들은 산 자들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죽은 자에 매이면 산 자들은 제대로 된 삶을 살 수가 없다. 죽음에 거대한 의미를 덧붙일 이유도 없다. 삶이 있으니 죽음이 있다. 시인은 그저 화장실에 가는 것처럼 슬그머니 지금 이 자리를 떠서 저편으로 가는 길에 들어서고 싶은 것이다.
사회적 명예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늘 죽음 이후를 걱정한다. 장례식장에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며 그들은 삶을 살면서도 자꾸만 죽음 이후에 집착한다. 한마디로 그들은 화장실에 가는 일처럼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 사방에 자신의 죽음을 알려 화려하게 저세상으로 가는 꿈을 꾼다. 거대한 빗돌을 세워 이 땅에 자신의 흔적을 뚜렷하게 남기고 싶다. 죽어서도 외롭지 않은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 삶은 더불어 살 수 있어도, 죽음은 더불어 죽을 수가 없다. 죽음은 온전히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시인은 “외로워지는 연습”을 이야기한다. 외로워지는 연습은 사람들과 맺는 관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않고 어떻게 삶을 유지할까? 시인이 말하는 외로움이란 생명의 본성과도 같은 것이다.
외로워지는 연습이라도 시작한 것일까? 시인은 홀로 술집을 빠져나온다.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를 걸으며 시인은 마음이 비로소 환해지는 것을 느낀다.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무언가를 시인은 죽음에 대한 시적 사유를 통해 풀어냈다. 더불어 해야 할 일이 있고, 홀로 해야 할 일이 있다. 죽음을 사유하는 일은 홀로 해야 하는 일이다. 죽음만큼 생명을 두렵게 하는 것이 어디에 있을까? 죽음에 맞닥뜨린 사람들은 뭉크의 ‘절규’에 나오는 사람의 얼굴로 비명을 내지른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자가 내지르는 이 비명을 시인은 마음 깊이 새겨 넣고 천천히 삭인다. 죽음과 싸워 이길 수 없으니 죽음을 끌어안고 사는 도리밖에는 없다. 그것을 시인은 “외로워지는 연습”으로 실천한다. 죽음으로부터 내빼지 않고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려고 한다. 죽음을 향해 환하게 웃는 시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