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지랑이 같은 인생길
나아갈 길이 없다 물러설 길도 없다
둘러봐야 사방은 허공 끝없는 낭떠러지
우습다
내 평생 헤매어 찾아온 곳이 절벽이라니
끝내 삶도 죽음도 내던져야 할 이 절벽에
마냥 어지러이 떠다니는 아지랑이들
우습다
내 평생 살아온 것이 아지랑이더란 말이냐
- 조오현, '아지랑이'
나아갈 길도, 물러설 길도 없는 절벽에 시인은 서 있다. 사방을 둘러봐도 허공만 보인다. 허웃음이 나온다. 무언가를 찾아 평생을 떠돌았는데 이른 곳이 절벽인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절벽이란 한계 상황과 같다. 인간의 한계 상황이란 죽음과 이어진다. 죽음만큼 인간을 얽어매는 게 어디에 있을까? 인간에게 죽음은 절대적인 타자와 같다. 아무리 달아나도 벗어날 수 없는 타자가 바로 죽음이다.
시인은 "끝내 삶도 죽음도 내던져야 할 이 절벽"이라고 쓴다. 절벽 앞에서는 삶도 죽음도 무의미하다. 아니, 삶과 죽음을 나누는 일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다. 살아서는 이 절벽을 벗어날 수 없다. 자기를 내려놓는 위험한 과업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절벽을 벗어나는 힘을 얻을 수 있따. 목숨을 건 도약이니, 치명적인 도약이니 하는 말들이 왜 나왔겠는가? 목숨을 걸지 않고 다른 세계로 건너갈 방법은 없다.
목숨을 건다는 것은 생목숨을 끊는 일을 의미하지 않는다. 생목숨을 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목숨을 건다는 건 지금까지 마음 깊이 품은 이념=통념을 주저 없이 내려놓는 걸 의미한다. 한줌의 지독한 욕망에 사로잡혀 다른 세계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삶과 죽음을 명확히 구분한다. 죽음으로부터 멀어져야 행복한 삶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호모 데우스'라는 말을 떠올려 보라.
삶과 죽음이 어울리는 절벽 앞에 서도 "마냥 어지러이 떠다니는 아지랑이들"만 보일 뿐이다. 시간이 흐르면 아지랑이들은 사라진다. 시인은 다시 "우습다"라고 쓴다. 평생을 붙잡고 살아온 것이 아지랑이들이라는 사실을 시인은 죽음이 감도는 절벽 앞에서 깨닫는다. 절벽과 아지랑이를 따로 썼지만, 어찌 보면 절벽 또한 아지랑이인지도 모른다.
모든 사물이 아지랑이 같은 세상에서 삶과 죽음을 나누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오늘도 시인은 그래서 가만히 길을 걸으며 사물을 들여다보는 일을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