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는 왜 슬퍼하는가?
물론 나는 잘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누구는 죽었고 누구는 살아남았다. 죽어야 할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니고, 살아야 할 사람이 산 것도 아니다. 시인의 말마따나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시인은 살아남았고, 친구들은 죽었다. 살아남은 시인은 죽은 친구들을 애도한다. 애도는 죽은 자를 위로하는 의식이면서도, 동시에 살아남은 사람의 아픔을 치유하는 의식이기도 하다.
애도를 통해 죽은 자는 저승으로 가고, 살아남은 자는 이승에서 살길을 모색한다. 시인 또한 이런 과정을 거쳐 하루하루 살아갈 힘을 얻었을 것이다.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을 마음 깊은 곳에 밀어 넣고, 죽은 자들이 살지 못한 오늘을 묵묵히 보냈을 것이다. 지난밤 꿈속에서 시인은 친구들을 만났다. 살아남은 시인을 말하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라는 말을 듣자마자 시인은 가슴 깊은 곳이 울렸다.
시인은 자신이 강한 자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강한 자란 권력을 쥔 자가 아닌가? 그 말을 듣고 시인은 자신이 한없이 미워졌다.
살아남은 자 앞에 죽은 자가 있다. 죽은 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죽은 자의 말을 시인은 꿈속에서 듣는다. 꿈속이란 시인의 무의식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시인은 정말로 살아남은 게 부끄럽다. 오죽하면 살아남은 자신을 미워할까? 죽은 자가 있기에 살아남은 자는 슬프다. 다른 이유는 없다.
<덧붙이는 글>
2022년 12월 16일은 이태원 참사로 죽은 이들의 49재 날이었다. 2022년 10월 29일은 한없이 슬픈 날이다. 같은 장소에 모인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살아남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살아남은 자는 죽은 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잘 안다. 죽은 자가 없었으면 그곳은 한바탕 축제의 향연이 벌어진 장소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그 장소에서 누군가가 죽었고, 그곳에서 살아남은 자는 슬픔에 겨워 목을 멘다. 추모의 정을 내보이는 일만으로는 애도가 되지 않는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우리는 지금도 겪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