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길은 광야로 통한다
하나의 불꽃에서
수많은 불꽃이 옮겨붙는다
그리고는
누가 최초의 불꽃인지
누가 중심인지 알 수가 없다
알 필요도 없어졌다
중심은 처음부터 무수하다
그렇게 내 사랑도 옮겨붙고
산에 산에
꽃이 피네
- '촛불 시위'
"하나의 불꽃에서/ 수많은 불꽃이 옮겨붙는다"라는 시구에 표현되듯, 저마다의 시민들이 든 촛불이 물결을 이루어 거대한 강을 이루었다. "누가 최초의 불꽃인지/ 누가 중심인지/ 알 수가 없다". 수많은 불꽃이 있는 만큼 수많은 중심이 있다. 광장에 모인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심이다. 모든 시민이 중심이므로 굳이 중심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광장에는 중심이 없다. 이곳을 중심이라고 선언하는 순간 저곳이 중심이 되고, 저곳을 중심이라고 선언하는 순간 그곳이 중심이 된다.
하나의 불꽃이 수많은 불꽃으로 옮겨붙는 과정을 시인은 '사랑'이라는 시어로 표현한다. 잎이 잎으로 번지고 꽃이 꽃으로 번지는 것 또한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사랑의 촛불로 피워 올린 수많은 불꽃이 산으로 번진다. "산에 산에/ 꽃이 피네"라는 구절로 시인은 온 세상을 뒤덮은 불꽃의 향연을 드러낸다. 광장에서 피어난 촛불 하나가 수많은 불꽃으로 번져 온 산을 수놓을 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사랑으로 가득 찬 사회로 뒤바뀔지 모른다. 상상일 뿐이라고 내칠 것은 없다. 현실이란 곧 상상의 이면이니까.
사람 사는 소리가 웅얼거려 알 수가 없다
밖으로 가니 안이 그립고
안으로 가니 밖이 그립고
안팎을 하나로 하겠다고 얼마나 덤볐던가
저 물빛은 안인지 밖인지
오늘 아침 얼음물에 빨래를 하는데
그 물빛이 얼마나 눈부시던지
- '물빛'
인간은 늘 안과 밖을 나누려고 한다. 안과 밖을 구분하지 않으면 질서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안은 안이고 밖은 밖이어야 질서가 유지된다. 안과 밖을 나누면 차별이 생긴다. 안에 있는 사람은 안에 있는 의식으로 밖을 판단한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괴물로 부른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사상 논쟁의 그늘에 묻혀 있다. 안에 있는 이들은 밖에 있는 이들을 부정하고, 밖에 있는 이들은 안에 있는 이들을 부정한다. 생성을 위한 부정이 아니라, 부정을 위한 부정을 반복한다.
시인은 오늘 아침 얼음물에 빨래를 하다가 눈부시게 빛나는 물빛과 문득 마주친다. "저 물빛은 안인지 밖인지"라고 시인은 묻고 있다.
물빛은 그저 물빛일 뿐이다. 물빛의 안과 밖을 나누는 사람들은 물빛 자체를 보려 하지 않고 물빛에 부여된 의미를 자꾸만 따지려고 한다. 물빛에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물빛은 안과 밖이 구분된 사물로 변질된다.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 빛나는 저 물빛마저도 사람들은 사상의 눈으로 들여다본다. 빨간 안경을 쓰면 빨간 물빛이 보이고, 파란 안경을 쓰면 파란 물빛이 보인다. 거짓이다. 제대로 된 물빛을 보려면 안경을 벗으면 된다. 아주 간단한 이 일을 사람들은 왜 외면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