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은 언제나 사랑 속에 머문다
할머니는 산그늘에 앉아 막대기로 참깨를 털고
어머니는 따가운 햇살 등에 받으며 호미로 고추밭을 매고
아버지는 이랴 자랴 소를 몰아 논수밭에서 쟁기질을 하고
나는 나는 학교 갔다 와서 산에 들에 나가
망태 메고 꼴을 베기도 하고 염소를 먹이기도 했지요
나는 보고는 했지요 어린 시절에
할머니가 깨를 터시다 말고 막대를 훼훼 저어
모밀밭을 해치는 산짐승을 쫓는 시늉을 하는 것을
나는 보고는 했지요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김을 매시다 말고 사금파리를 주워
고춧잎에 붙은 진딧물을 긁어내는 것을
나는 보고는 했지요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쟁기질을 잠시 멈추시고 꼬챙이를 깎아
황소 뒷다리에 붙은 진드기를 떼어내는 것을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 시에는
그 시절 우리 식구들이 미워했던 것들-
산짐승 진딧물 진드기 같은 것이 자주 나오지요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 시에는
그런 것들을 내치느라 일손을 잠시 놓으시고
우리 식구들이 대신 들었던 것들-
막대기 사금파리 꼬챙이 같은 것이 많이 나오지요
- '시에 대하여'
김남주는 시를 통해 현실 너머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현실 속에서 시를 본다. 더불어 살 수 없는 존재와 싸우는 양식으로 시를 정립한다. 어린 시절 시인은 깨를 터시던 할머니가 막대를 훼훼 저어 산짐승을 쫓는 시늉을 하는 걸 보았다. 김을 매시던 어머니는 사금파리를 주어 고춧잎에 붙은 진딧물을 긁어냈고, 쟁기질을 잠시 멈춘 아버지는 꼬챙이를 깎아 황소 뒷다리에 붙은 진드기를 떼어냈다.
할머니와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런저런 방법으로 쫓아내고 긁어내고 떼어낸 산짐승과 진딧물과 진드기를 시인은 "그 시절 우리 식구들이 미워했던 것들"로 표현한다. 할머니와 어머니와 아버지는 막대기와 사금파리와 꼬챙이로 이 미운 것들과 맞서 싸웠다. 시인이 된 김남주가 싸우는 방식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싸우지 않고 어떻게 미운 것들을 몰아낼 수 있을까? 그에게 시작(詩作)은 미운 것들과 대차게 싸우는 일을 말한다. 순수시니, 예술지상주의니 하는 말을 그는그래서 거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골길이 처음이라는 내 친구는
흔해빠진 아카시아 향기에도 넋을 잃고
촌뜨기 시인인 내 눈은
꽃그늘에 그늘진 농부의 주름살을 본다
바닷가가 처음이라는 내 친구는
낙조의 바다에 사로잡혀 몸둘 바를 모르고
농부의 자식인 내 가슴은 제방 이쪽
가뭄에 오그라든 나락잎에서 애를 태운다
뿌리가 다르고 지향하는 바가 다른
가난한 시대의 가엾은 리얼리스트
나는 어쩔 수 없는 놈인가 구차한 삶을 떠나
밤별이 곱다고 노래할 수 없는 놈인가
- '가엾은 리얼리스트'
사물은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법이다. 시골길이 처음인 친구는 흔해 빠진 아카시아 향기에도 넋을 잃지만, 촌뜨기 시인의 눈에는 꽃그늘에 그늘진 농부의 주름살이 먼저 보인다. 아카시아 향기에 넋을 잃은 친구는 왜 농부의 그늘진 주름살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 살아온 삶이 다르기 때문이다. 관점은 구체적인 삶 속에서 형성된다. 자본가는 노동자의 비참한 삶에 관심이 없다. 당연히 그들이 사는 삶이 보이지 않는다.
낙조의 파도에 사로잡혀 몸둘 바를 모르는 또 다른 친구는 제방 이쪽에 펼쳐진 "가뭄에 오그라든 나락잎"을 보지 못한다.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난 시인의 눈에는 그토록 잘 보이는 나락이 말이다. 시인은 "가난한 시대의 가엾은 리얼리스트"로 자신을 표현한다. 그는 민중의 구차한 삶을 외면한 채 밤별이 곱다는 노래를 부를 수가 없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시가 아니다. 현실과 시를 일치시킨 김남주의 시학을 우리는 이 시를 통해 정확히 알 수 있다고 하겠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입만 살아서 중구난방인 참새떼에게 물어본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다리만 살아서 갈팡질팡인 책상다리에게 물어본다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져
난마처럼 어지러운 이 거리에서
나는 무엇이고
마침내 이르러야 할 길은 어디인가
갈 길 몰라 네거리에 서 있는 나를 보고
웬 사내가 인사를 한다
그의 옷차림과 말투와 손등에는 계급의 낙인이 찍혀 있었다
틀림없이 그는 노동자일 터이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어요 선생님은
그의 물음에 나는 건성으로 대답한다 마땅히 갈 곳이 없습니다
그러자 그는 집회에 가는 길이라며 함께 가자 한다
나는 그 집회가 어떤 집회냐고 묻지 않았다 그냥 따라갔다
집회장은 밤의 노천극장이었다
삼월의 끝인데도 눈보라가 쳤고
하얗게 야산을 뒤덮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추위를 이기는 뜨거운 가슴과 입김이 있었고
어둠을 밝히는 수만 개의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고
한입으로 터지는 아우성과 함께
일제히 치켜든 수천 수만 개의 주먹이 있었다
나는 알았다 그날 밤 눈보라 속에서
수천 수만의 팔과 다리 입술과 눈동자가
살아 숨쉬고 살아 꿈틀거리며 빛나는
존재의 거대한 율동 속에서 나는 알았다
사상의 거처는
한두 놈이 얼굴 빛내며 밝히는 상아탑의 서재가 아니라는 것을
한두 놈이 머리 자랑하며 먹물로 그리는 현학의 미로가 아니라는 것을
그곳은 노동의 대지이고 거리와 광장의 인파 속이고
지상의 별처럼 빛나는 반딧불의 풀밭이라는 것을
사상의 닻은 그 뿌리를 인민의 바다에 내려야
파도에 아니 흔들리고 사상의 나무는 그 가지를
노동의 팔에 감아야 힘차게 뻗어나간다는 것을
그리고 잡화상들이 판을 치는 자본의 시장에서
사상은 그 저울이 계급의 눈금을 가져야 적과
동지가 바르게 식별한다는 것을
- '사상의 거처'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고 시인은 묻는다. 길은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져 있지만, 시인은 도무지 "나는 무엇이고/ 마침내 이르러야 할 길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다. 갈 길을 모르는 시인에게 한 노동자가 다가와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다. 마땅히 갈 곳이 없다고 하자, 그는 집회에 같이 가자고 이야기한다. 시인은 별다른 말없이 사내를 따른다. 눈보라가 치는 삼월에 어둠을 밝히는 수만 개의 눈빛이 모여 일제히 수천 수만 개의 주먹을 치켜든다.
차가운 노천 광장에 모인 노동자들이 펼쳐내는 "거대한 율동"에서 시인은 비로소 사상의 거처를 찾는다. 사상의 거처는 "노동의 대지이고 거리와 광장의 인파 속이고/ 지상의 별처럼 빛나는 반딧불의 풀밭"이라고 시인은 외친다. 사상의 촛불을 들고 사람들이 서 있던 그 광장에서 생성된다. 사상은 실천을 요구한다. 사상의 거처는 따라서 실천이 이루어지는 장소에 있을 수밖에 없다. 어떤 이념으로 뭉쳐 사람들이 광장에 모인 것은 아니다. 이념은 이념일 뿐이다. 사람들이 행동으로 표현하는 순간 이념은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