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어른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다
하늘의 별들이
땅으로 내려온 것일까요.
도랑가 여뀌
저마다 꽃을 피우고 있어요.
밤이면 하늘에 뜨고
낮이면 땅에 내려와
별이 되었다가
들꽃이 되었다가
이 가을에 별들은
하늘과 땅을
몰래몰래 오가는 것일까요.
- '별'
동심에 물든 시인은 하늘과 땅을 나누지 않는다. 하늘과 땅을 나누지 않은 사람이 그 안에 사는 사물들을 나눌 까닭이 없다. 하늘에 뜬 별들이 땅으로 내려오면 도랑가에 핀 여뀌가 된다고 시인은 이야기한다. 여뀌만 될까? 밤이면 하늘에 뜬 별이 되었다가 낮이면 땅에 내려와 들꽃이 되는 별을 상상하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별과 들꽃이 하나로 연결되듯, 밤과 낮도 하나로 연결되고 하늘과 땅도 하나로 연결된다.
하늘과 땅을 몰래몰래 오가는 별을 가슴에 품고 시인은 하늘과 땅을 나누고, 인간과 자연을 나누는 문명 세계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문명에 흠뻑 젖은 이들은 하늘의 별이 땅으로 내려와 들꽃이 되는 이치를 모른다.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 이치를 알게 되면 모든 사물에 경계를 짓는 인간의 논리는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임길택은 별이 들꽃이 되는 이치를 마음에 품고 시를 쓴다. 모든 사물은 태어나는 순간 모든 사물과 이어진 삶을 살게 된다.
화장실 뒤편 작은 언덕에
고들빼기 한 포기
노랗게 꽃을 피웠다.
가느다란 꽃가지 이리저리 올려놓고
풀잎 사이에서
작게 작게 흔들거렸다.
호두나무 위
까치 소리 들으며
먼 산 뻐꾹새 소리 들으며
내리는 햇볕
온몸에 받고 있었다.
- '고들빼기'
모든 생명은 모든 생명과 이어져 있다고 했다. 이것은 관념이 아니라 살아 있는 감각과 같다. 화장실 뒤편 작은 언덕에 피어난 고들빼기 한 포기라고 다르지 않다. 가느다란 꽃가지를 이리저리 뻗친 고들빼기는 풀잎 사이에서 가만히 흔들린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곳에 꽃이 피어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다. 그래도 고들빼기는 몸의 감각을 온통 바깥을 향해 내뻗고 있다. 바깥과 이어지지 않으면 고들빼기는 간신히 얻은 생명을 보존할 수가 없다.
호두나무 위에서 까치 소리가 들린다. 그보다 먼 산에 있는 뻐꾸기 소리도 들린다. 그 소리를 들으며 고들빼기는 땅 위로 내리비치는 햇볕을 온몸으로 받는다. 한 생명이 태어나 성장하려면 햇볕이 필요하고, 따뜻한 비가 필요하고, 뭇 생명의 아름다운 소리가 필요하다. 고들빼기는 태어나자마자 자신을 바깥으로 활짝 열어젖힌다. 생명은 혼자 살 수 없다. 더불어 살 때만이 생명은 생명으로서 값진 삶을 살 수 있다.
장난감을 가득 실은 손수레를 끌고
할아버지가 골목 앞에 나타나셨다.
학원에 간 선아를 눈 빠지게 기다리다가
정아는 두 눈이 둥그레져 손수레 옆으로 갔다.
곰돌이, 말, 강아지 들이
정아를 보고 벙긋벙긋 웃는 것만 같았다.
정아도 플라스틱 장난감들한테
웃으며 속으로 인사를 했다.
할머니들이, 아주머니들이
꼬마 아이에게 곰을 사 주고 토끼를 사 주었다.
여섯 살 정아도 하나 갖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엄마가 없다.
식당에만 있는 엄마는
할아버지 장난감 차가 온 걸 알지도 못한다.
정아는 한 발짝 더 손수레 앞으로 다가간다.
절 보고 웃는 곰돌이를 만져보고 싶다.
차마 손을 내밀지 못하고 있는데
담 너머 살구꽃이 바람에 날려
정아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 '봄날'
학원에 간 언니를 기다리는 아이가 있다. 이름이 정아다. 장난감을 가득 실은 손수레를 보고 정아 눈이 둥그레진다. 곰돌이가 있고, 말이 있고, 강아지가 있다. 장난감들이 정아를 보고 웃는다. 정아도 빙그레 웃으며 장난감들에게 인사를 한다. 손에 손에 장난감을 든 아이들을 정아는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정아도 장난감이 갖고 싶지만, 엄마는 지금 식당에서 일한다. 돈이 없어 장난감을 사지는 못해도, 정아는 한 발짝 더 손수레 앞으로 다가간다. 자기를 보고 웃는 곰돌이를 살짝 만져라도 보고 싶다.
제 것도 아닌 장난감을 만지는 게 쑥쓰러운가, 정아는 차마 손을 내밀지 못한다. 만질까 말까 고민 아닌 고민을 하는데, 담 너머에서 바람에 날려온 살구꽃이 정아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린다. 정아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에는 안타까움이 묻어 있다. 그런 안타까움을 바람에 날려온 살구꽃이 씻어준다. 장난감을 갖지 못해 서글픈 아이의 마음을 시인은 살구꽃으로나마 위로해 주고 싶다. 아름다운 봄날의 풍경을 살구꽃의 감각으로 표현했다고 말하면 어떨까? 슬픔을 그저 슬픔으로 표현하지 않은 데서 동심이 피어난다는 걸 시인은 이 시를 통해 분명히 보여준다고 하겠다.
길러지는 것은 신비하지 않아요.
소나 돼지나 염소나 닭
모두 시시해요.
그러나, 다람쥐는
볼수록 신기해요.
어디서 죽는 줄 모르는
하늘의 새
바라볼수록 신기해요.
길러지는 것은
아무리 덩치가 커도
볼품없어요.
나는
아무도 나를
기르지 못하게 하겠어요.
나는 나 혼자 자라겠어요.
- '나 혼자 자라겠어요'
인간은 이런저런 용도로 동물을 기른다. 동물을 길들여 인간의 입맛에 맞는 짐승으로 만들어버린다. 위 시에 나오는 아이 화자는 "길러지는 것은 신비하지 않아요."라고 분명히 말한다. 길러지는 동물에서 생명의 신비를 발견할 수 없다는 얘기다. 소나 돼지, 염소와 닭 들에 비한다면, 다람쥐는 볼수록 신기하다는 아이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라. "어디서 죽는 줄 모르는/ 하늘의 새" 또한 바라볼수록 신기하다는 아이의 말을 문명에 길들여진 어른들이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이다.
시인은 야생을 사는 동물과 사람이 기르는 동물을 대비하고 있다. "길러지는 것은/ 아무리 덩치가 커도/ 볼품없어요."라는 시구에 드러나는 대로, 시인은 길러지는 게 생명의 본성을 빼앗는 일이라고 선언한다. 이 시에 나오는 아이 화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아무도 나를/ 그리지 못하게 하겠어요."라고. "나는 나 혼자 자라겠어요."라는 아이의 의지는 과연 지금 이 사회에서 실현될 수 있을까? 아이를 통해 자기 소망을 펼치려는 어른들의 욕망을 이 아이는 물리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