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형식과 책임 윤리
- 구병모의 『위저드 베이커리』
지금 이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가갈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한다. 다가갈 수 없는 세계라는 점에서 그 세계는 현실의 외부에 있지만, 현실과 ‘더불어’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 세계는 항상 우리와 함께 있다. 모순되는 발언인 듯 보이는 이 말 속에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진실’이 담겨 있다. 우리가 보는 세상이 세상의 전체는 아니라는 것, 그래서 우리가 보는 세상 너머에는 우리의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어떤 세계’가 있다는 것이 이 ‘진실’의 내용을 규정한다. ‘진실’이라는 말을 ‘본질’이라는 말로 환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진실은 본질이 아니라 본질 너머에 있다.
구병모의 『위저드 베이커리』(창비, 2009)는 ‘빵집’이라는 일상적 공간을 배경으로, 일상적인 삶 너머에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위저드 베이커리’는 분명히 현실에 존재하지만, 누구나 그 현실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보이되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 지점을 형상화하고 있다. 위저드 베이커리의 환상적 세계는 현실세계의 이면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세계’를 향해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마법’으로 빚어진 빵을 통해 타인들의 삶을 통제하려는 사람들의 욕망을 윤리적 책임의 문제와 접맥하여 허구적으로 펼쳐내는 소설의 세계는 우리네의 일상적 삶에 드리워진, 타자에 대한 지배욕망을 명확하게 표출한다.
‘위저드 베이커리’에서는 정체불명의 빵들이 만들어진다. 인터넷을 통해서만 판매되는 정체불명의 빵들에는 소망을 빌면 곧바로 효과가 나타나는 마법적인 기능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의 소망은 항상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충족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사용하면 부작용이 있을 것이라는 경고문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재미 삼아 혹은 소망을 정말로 이루고 싶어 빵을 구매한다. ‘악마의 시나몬 쿠키’라는 빵이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방에게 먹이면 평균 2시간 동안 뇌신경세포를 교란시켜 그가 무슨 일을 해도 실수를 하게 만드는 빵이다. 한 여학생이 전교 1등인 친구에게 이 빵을 선물한다. 빵을 먹은 친구는 복통에 시달리다가 답안지를 한 칸씩 밀려 쓰는 실수를 범한다. 상황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복통에 시달리던 친구가 답안지를 제출하던 순간, 교실에서 그만 ‘실례’를 해버리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전교로 퍼졌고, 고민하던 친구는 약을 먹고 자살한다. 친구에게 빵을 준 여학생은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밤마다 악몽에 시달려요……. 유심히 본 애들은 없겠지만, 쉬는 시간에 내가 그 애한테 과자를 주는 걸 누구라도 한 명쯤 보기는 봤을 거란 말이에요. 두 가지 일에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쉽지 않겠지만요.”(77쪽)
여학생은 밤마다 악몽에 시달린다고 말한다. 친구에 대한 죄책감 때문일까? 아니다. 죽은 친구에게 빵을 주는 것을 누군가 봤을까봐 그녀는 매일 밤 악몽을 꾼다. 자살과 빵 사이에 어떤 연관성을 찾기는 힘들 거라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그 사실이 알려지면 주변에서 자신을 비난할 수 있다는 점을 그녀는 걱정하고 있는 셈이다. “재미 반, 호기심 반, 아이디어숍에서 엽기 상품 사는 기분으로 산 거였어요.”라는 말에 드러나듯, 그녀는 친구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점을 애써 회피하려 한다. 그녀가 ‘위저드 베이커리’의 점장(마법사)에게 따지러 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생목숨을 앗아간 사건이 아닌가. 자신에게 책임이 없다면 당연히 그 빵을 만든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스스로 선택한 일에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여학생의 이러한 태도(심리)는 실상 이 소설의 주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작가는 점장(마법사)의 입을 빌어 ‘책임의 윤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자신이 선택한 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친구에게 빵을 준 여학생이 책임을 회피할 때, 세상은 부조리한 선택만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악순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점장은 책임의 윤리를 ‘반성적인 삶’으로 돌려서 말하고 있다. 여학생은 자신이 선택한 일을 반성하지 않는다. 그녀는 호기심 때문에 그 일을 했다고 하지만, 그 때문에 친구는 억울하게 죽었다. 개인의 호기심과 타자의 죽음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이 지점에서 ‘책임의 윤리’가 생성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빠진 여학생(주체)의 내면에는 타자에 대한 배려의 마음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고통 받는 타자의 얼굴은 저 먼 곳에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책임의 윤리’는 어떻게 이 세상에서 실천될 수 있을까? 이복 누이동생을 성추행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집을 뛰쳐나온 주인공 나(고1 남학생)는 ‘위저드 베이커리’라는 마법의 공간 속에서 이러한 질문과 맞닥뜨리고 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것을 의미한다. 선택의 이면에는 그만큼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다. 타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마법의 빵을 선택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선택의 대가로서 ‘부작용’이 뒤따른다. 친구에게 빵을 준 여학생은 악몽을 꾸며 괴로워하고 있고,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 사람에게 빵을 준 여자 역시 ‘남자의 집착’이라는 부작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마법의 빵이 그 부작용까지 감당할 수는 없다.
선택한 삶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이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실천’의 구체적 맥락이다. 인간은 수없이 선택해야 할 상황에 직면하고, 그렇게 선택한 삶들이 모여 한 사람의 삶의 질이 결정된다. 중요한 점은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한 순간, 그 선택의 상황 속에는 다른 사람들의 삶과 연관된 선택의 순간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시간을 되돌리는 빵인 ‘타임 리와인더’는 시간을 되돌리는 행위(선택)에 스며들어 있는 윤리성의 의미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시간을 되돌리면 그 시간 속에 공존하던 모든 생명들의 시간 역시 되돌려져야 한다. 선택은 나의 선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타자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을 동반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주인공이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의 ‘가능한’ 상황을 소설의 결말로 제시하고 있다. 누이동생을 성추행한 범인이 ‘아버지’임을 알게 된 주인공은,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결혼하기 이전의 세계로 시간을 되돌린다. 아버지는 새어머니와 결혼하지는 않았지만, 아동 성추행범으로 몰려 감옥에 들어간다. 새어머니와의 갈등이라는 상황은 사라졌지만, 타인들의 삶 역시 미묘한 차원에서 뒤바뀌었다. 주인공 역시 ‘위저드 베어커리’와 관련된 모든 기억을 상실한다.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도 분명히 있는 셈이다. 주인공이 선택할 수 있는 또 다른 상황은 시간을 되돌리지 않고 묵묵하게 현재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는 위저드 베이커리를 기억하고 있고, 또 그 세계가 여전히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다. 작가는 두 가지의 상황을 의도적으로 배치하고 있을 뿐, 그 세계들에 대한 가치 판단은 내리지 않고 있다. 그것은 주인공이 선택한 삶이고, 따라서 주인공이 책임지고 살아가야 할 삶이기 때문이다.
『위저드 베이커리』는 환상의 서사적 형식을 통해 책임 있는 삶의 윤리를 되묻고 있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고, 그 책임은 또 다른 삶의 대가로 끊임없이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이 소설은 강조한다. 그 과정에서 선택한 사람은 무언가를 얻을 수도 있고 잃을 수도 있다. 그것이 삶의 본질이다. 청소년 소설에서는 다루기가 쉽지 않은 주제를 작가는 환상의 형식을 빌려 제대로 그려내고 있다. 한 고등학생의 실존적 고민으로 해소될 수 없는 사안이라는 점에서, 이 소설은 청소년 소설의 범위를 넘어서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삶에는 인정하기 힘든 ‘무거운 진실’이 도사리고 있다. 청소년의 삶도 그렇다. 무거운 진실을 가볍지만 무거운 형식으로 묘사하는 청소년 소설이 필요한 시점에서, 위저드 베이커리는 하나의 예시적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