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하는 삶의 문학적 의의
- 김려령, 완득이
김려령이 쓴 완득이는 “제발 똥주 좀 죽여주세요”라는 완득이의 기도로 시작하고 있다. ‘똥주’는 완득이 담임선생인 이동주의 별명이다. 완득이는 일주일 내내 자신을 괴롭히는 이동주 선생이 벼락을 맞아 죽거나, 자동차에 치여 죽기를 간절하게 소망하고 있다. 이동주 선생이 완득이를 어떻게 대했길래 이런 극단적인 생각을 하고 있을까? 완득이는 이동주 선생이 자신을 배려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이동주 선생은 교실이라는 공개석상에서 가난한 학생에게 지급되는 물품을 찾아가라고 완득이에게 말한다. 그것도 모자라 완득이의 옆집에 살면서 수시로 지급된 물품(햇반)을 ‘빼앗아’ 먹는다. 한마디로 이동주 선생은 완득이에게 ‘재수 없는’ 인물로 비쳐지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완득이는 이동주 선생에게 빠져든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살고 싶은 그를 이동주 선생은 조용하지 않은 세상의 광장으로 계속 이끌어내려 한다. 이동주 선생은 어릴 때 집을 나간 완득이 어머니의 소식을 전해주고, 완득이가 어머니와 만나길 꺼려하자 어머니에게 완득이가 사는 집을 알려주기도 한다. 완득이는 이동주 선생의 참견에 어이없어하지만,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유일한 사람이 이동주 선생이기에 그를 미워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이동주 선생은 친아버지 공장을 ‘노동 착취’로 신고할 정도로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 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이주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있는 돈을 털어 교회 건물을 사고, 그곳에서 그는 이주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하는 활동을 활발하게 벌인다. 그는 아버지의 공장에서 필통을 판금하는 일을 하다가 손가락이 잘린 ‘티로 누나’의 삶을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치료는커녕 월급도 받지 못한 채 고향인 베트남으로 강제 출국을 당했다. 이동주 선생은 티로 누나의 억울한 삶을 기억하며, 기억 속의 상처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사회를 갈망하고 있다. 다소 무모하게 보이는 이동주 선생의 사회적 행동들은 사회가 변해야 기억 속의 상처도 치유될 수 있다는 신념에서 비롯된다. 그리하여 완득이가 내면으로 숨을수록 이동주 선생은 더 큰 소리로 완득이를 부른다. 숨어서 살면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상대방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듯싶은 행동의 이면에는 상대방을 향한 치밀한 배려가 깔려 있는 셈이다.
완득이는 이동주 선생이 “내가 또 숨어도 꼬박꼬박 찾아줬다”고 고백한다. 아버지가 자신의 상처에 매여 완득이의 삶을 평가할 때, 이동주 선생은 완득이를 어떻게든 밝은 세상으로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한다. 완득이에 등장하는 어른 인물들은 한결같이 완득이 못지않게 상처받은 인물들로 형상화된다. 그러나 상처에 대응하는 방식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신들의 상처를 내면으로 갈무리하며 내면으로 숨어들어간다면, 이동주 선생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당당하게 사회(제도)와 맞서고 있다. 완득이를 밝은 세상으로 이끌어내는 이동주 선생의 형상은 그대로 이 시대 어른들이 짊어져야 할 사회적 책임을 환기한다.
그럼에도 이동주 선생에 드리워진 소설적 그늘이 너무나 깊다. 이미 세상의 진실을 알아버린 이동주 선생의 ‘영웅적인’ 행동이 작품 전편에 걸쳐 반복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상처받은 존재들을 향한 이동주 선생의 ‘배려하는 마음’이 강조될수록 완득이를 비롯한 다른 인물들의 삶은 그만큼 이동주 선생의 그늘에 가려진다. ‘춤 교습소’를 열어 완득이 아버지의 예술적 열정에 불을 지피는 장면에 이르면, 이상적인 어른 인물을 형상화하려는 작가의 강박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