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성장하는 청소년 인물들
- 김혜정 『하이킹 걸즈』
김혜정의 『하이킹 걸즈』에 등장하는 ‘문제아’ 이은성은 어른들의 제도적 사유가 빚어낸 현실과 불화를 겪는 인물이다. 은성은 ‘미혼모’라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녀는 엄마가 미혼모라는 사실 때문에 깊은 피해의식에 젖어 있다. 학교에서 ‘개은성’ ‘미친 주먹’으로 불리는 그녀는 친구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느낌이 들면 주먹(폭력)으로 응징한다. 실크로드 도보여행의 원인이 된 유지연 폭행 사건도 엄마를 미혼모라며 욕하는 상황을 참지 못함으로써 발생한다. ‘미혼모’라는 말에 담긴 사회(제도)적 차별의식은 은성의 엄마뿐만 아니라 은성의 마음에도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엄마는 술을 마시면 은성을 보며 “이은성, 왜 네가 내 인생을 망쳐? 네까짓 게 뭔데?”(133쪽)라고 소리치며 은성의 여린 감성을 뒤집어놓는다. 엄마도 억울했을 것이다. 한때의 ‘실수’가 인생 전체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나타날 때, 은성은 엄마에게 떼어내고 싶은 혹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은성이 아주 어렸을 때 놀이 공원에 그녀를 버리기까지 한다. 나중에 상황을 파악한 할머니가 은성을 집으로 데려오지만, 은성은 그때의 상황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은성의 엄마는 고등학교 때 ‘엄마’가 되었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어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10대의 엄마에게 사회(제도)는 ‘미혼모’라는 딱지를 붙이고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사회가 원하는 방식대로 엄마(어른)가 되지 않은 그녀에게 ‘엄마’로서의 삶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잉여의 삶이다. 할머니와 틈만 나면 싸우고, 은성에게 신세 한탄을 늘어놓는 엄마의 형상은 제도적으로는 어른이되 결코 어른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아슬아슬한 경계 위의 존재를 생각나게 한다.
은성이가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엄마는 결혼하려고 했지만, 은성의 존재를 알게 된 남자 집안의 반대로 결국 무산된다. 엄마의 입장에서 ‘미혼모’는 사회적 현실이다. 미혼모라는 처지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그것은 ‘주홍글씨’처럼 그녀의 가슴에 걸려 있다. 사회에서 인정하지 않는 삶을 산 대가치고는 너무나 큰 정신적 상처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일까, 하이킹 걸즈에는 청소년 문제를 해결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어른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 작품의 중심인물인 은성이 이런 상황에서 학교생활에 제대로 적응할 리는 없다. 폭력으로 소년원에 갈 신세가 된 은성은 절도를 한 보라와 함께 비행 청소년을 대상으로 실시되는 ‘실크로드 도보여행’에 자원하여 일시적으로 한국 사회를 떠나게 된다. 이들에게는 스스로의 힘으로 도보여행을 완수해야 하는 과제가 부여된다.
이 작품에는 도보여행을 인솔하는 ‘미주 언니’가 두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어른 인물로 등장한다. 미주 언니는 고2 때 부모의 이혼을 경험했다. “다른 애들은 평범한 가정에서 사는데, 왜 나만 엄마 아빠랑 따로 살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 너무 창피했고, 너무 싫었어.”(138쪽)라는 미주 언니의 말처럼, 그녀는 은성이나 보라와 마찬가지로 힘든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미주 언니는 은성과 보라와는 동등한 입장에 서 있다. 그녀는 은성과 보라에게 충고를 해주긴 하지만, 그 충고가 두 인물의 정신세계를 지배할 정도는 아니다.
도보여행에서 이탈한 은성과 보라가 스스로의 선택으로 도보여행을 끝내는 과정에 작가가 주목하는 이유는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한국에서 일만 저지르고 그에 대한 해결은 어른들에게 미루어야 했던 은성이나,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도보여행에서 이탈한 보라가 스스로 책임을 지고 도보여행을 완수하는 과정은 성장이 청소년 스스로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국(異國)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경험들을 통해 성장하는 청소년들의 모습은, 그 경험들이 비록 우연성을 남발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해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이상적인 어른 인물을 상정하지 않고도 청소년들의 정신적 성장이 가능할 수 있음을 무엇보다도 강조한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