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항과 방황, 그리고 성찰
- 전아리, 『직녀의 일기장』
어른들이 제도적인 삶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며 살아갈 때, 청소년들은 제도가 부여하는 획일적인 삶에 이의를 제기한다.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삶을 살면 인정받지만, 다른 아이들과 어긋나는 삶을 살면 항상 감시의 눈초리를 받아야 하는 삶은 청소년들의 숨통을 조인다. 전아리의 『직녀의 일기장』에 등장하는 직녀의 경우를 보자. 직녀는 학교에서 싸움으로 1등이다. 그래서 주변에는 그녀를 신봉하는 ‘똘마니들’이 많다. 학교 학생부 주임선생은 그녀를 주시한다. 언제 제도(학교) 밖으로 튀어나갈지 모르므로 직녀는 주임선생의 감시의 눈을 끊임없이 느끼며 학교를 다닌다. 어느 날, 학교 근처 영화관에서 벌어진 패싸움의 주범으로 주임선생은 다짜고짜 직녀를 지목한다. “나는 두 시간쯤 심문을 당하다가, 결국 어제 저녁 집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증명되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집에 돌아가자 엄마는, 마치 내가 일을 벌인 주동자라도 되는 듯 혀를 찼다.”
학교에서 찍히고, 집에서도 찍힌 직녀는 “오해를 하고도 도통 사과할 줄 모르는 어른들에게는 신물이 났다”며 가방을 챙겨 조용히 집을 나온다. 가출을 한 것이다. 그녀는 아빠의 주벽과 폭력에 시달리다 열다섯 살에 가출한 후 수원에서 살고 있는 친구 선영을 찾아간다. 직녀와 선영은 선영의 아빠에게 ‘복수’하기 위해 선영의 옛집을 찾아가기도 하는데, 할머니의 죽음 이후 거듭나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는 선영 아빠의 일상을 확인하고는 힘없이 되돌아온다. 자신들이 들어갈 자리가 그곳에는 없다. 호기 있게 복수를 다짐했지만, 마음을 잡은 사람에게 복수할 만큼 그들의 마음은 모질지 못하다.
직녀는 결국 집으로 돌아온다. “내 힘으로 비상할 수 있을 때까지는 참자.”라는 ‘한 줄 일기장’의 내용처럼, 집 밖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집 밖에서 보면 ‘집’은 청소년들이 비상할 수 있는 삶의 터전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집(제도)을 부정하며 가출한 청소년들은 집 밖이라는 공간도 여전히 제도의 그물망으로 짜여 있다는 점을 곧바로 깨닫는다. 자신의 힘으로 비상할 수 없는 존재가 살기에 집 밖의 세상은 너무나 가혹하다. 청소년 소설을 선도한 박상률의 봄바람(사계절, 1997)에 등장하는 주인공 훈필도 집(고향) 밖의 세계로 가출하지만 결국은 집으로 돌아온다. 청소년들은 제도에 반항하고 제도 속에서 방황하지만, 궁극적으로 제도적 삶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셈이다.
사회(제도)를 향한 청소년들의 저항이 제도 안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면, 저항은 자연스럽게 성찰의 과정으로 이어진다. 직녀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정체성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연결되면서, 동시에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윤리적 질문을 동반한다. ‘넌 커서 뭐가 될래?’ ‘넌 대체 왜 그러니?’와 같은 어른들의 질문에서 비껴나, 직녀는 자신이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는 이유를 되짚어 묻는다. 그 질문의 고리에는 두 사람(어른)의 삶이 깊이 개입되어 있다.
우선 로맨티스트 아빠의 삶이 있다. 어린 시절의 꿈을 간직하고 있는 아빠는 자식들의 대학 진학에만 관심이 있는 엄마와 달리 직녀의 꿈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묻는다. 아빠는 회사를 그만 두고 자신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할 정도로 꿈을 중시하는 인물인데, 그는 가족 여행 도중 ‘번지 점프’를 타며 자신의 의지를 증명해 보이기도 한다. 직녀는 한편으로 60대 초반의 멋쟁이 싱글로 살아가는 고모의 삶에 주목하고 있다. 미국에 사는 고모는 친구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온다. 자유롭게,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영위하는 고모를 직녀는 좋아하지만, 결혼식장을 나온 고모가 길거리에서 구토하는 장면을 보고는 애처로움을 느낀다.
지하상가에서 나는 당황했다. 내가 알던 고모는 설령 남의 가게 안에서 토했다 해도, 당당히 큰소리를 치며 돌아 나올 사람이었다. 그러나 상인들의 욕지기 속에서 나를 쳐다보던 고모의 눈빛은 예전과 달랐다. 나는 여장부 같은 고모에게서 보여서는 안 될 듯한, 애처로움과 비굴함을 느꼈다. 나이가 들고 있는 고모는, 더 이상 내가 응석을 부리며 매달려 지낼 수 있는 튼튼하고 든든한 고모가 아니었다. 나는 그와 같은 사실이 어쩐지 슬프면서도 불안했다.
튼튼하고 든든한 고모의 삶은 제도에 얽매여 사는 직녀에게는 이상적인 삶으로 비쳐진다. 그러나 직녀가 생각하는 고모의 삶은 고모가 살아온 삶의 한 단면일 뿐이다. 그 이면에는 고모만의 슬픔이 있다. 고모 친구들은 결혼을 했고, 손자와 손녀가 있는 제도 속의 일상적인 삶을 누려왔다. 친구들은 짙은 화장과 화려한 의상으로 한껏 멋을 낸 고모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젊은 사람들은 고모의 겉모습을 보며 험담을 늘어놓는다. 그들에게 고모는 제도에서 벗어난 일탈자이다.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아도 신경을 써야 하는 상황은 고모를 불안하게 만든다. 긴장된 마음으로 사람들을 만나는 것만큼 힘든 게 있을까. 애처롭고 비굴한 상황의 근원은 고모가 처한 이러한 문제로부터 기인한다.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왔지만, 그것을 당당하게 내세우지 못하는 고모의 삶은 고모를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생각했던 직녀에게 ‘어른으로서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