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는 전염되지 않아요.
-영화 「래빗 홀」 중에서
사건은 비극입니다. 세월호가 가라앉았고 천안함이 폭파되었으며 일용노동자들이 불구의 몸이 되었습니다. 피해자는 안타깝게도 비극의 이유를 모릅니다. 그러는 사이 가해자들이 고개를 숙이며 매스컴에 노출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가해자들의 잘못을 밝혀낼수록 사회 곳곳의 제도적 모순이 앙상하게 드러나고 맙니다. 비극의 터널을 지나가면서 우리는 분노하게 됩니다. 분노는 당연한 권리이니까요. 그러나 어느 순간 분노할수록 절망의 그림자가 생겨납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미래의 피해자들이 될 수 있으며 혹독한 형벌을 당해야만 하는 게 믿기지 않아 그렇습니다. 결코 이것이 망상이 아니라는 게 까다로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근본적인 질문을 해봅니다. 피해자들이 왜 죄인이 되어야만 하는지? 의문스러웠습니다. 피해자라고 하면 당연히 치료받고 사회적으로 지지를 받아야 평등한 세상입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단단할 정도로 불평등합니다. 피해자에 대한 예의는 어디에도 없고 새빨간 거짓말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사건에 대한 진실은 흐지부지 끝나고 맙니다.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가해자에 대한 인권은 철저히 보호하면서 대조적으로 피해자에 대한 인권은 슬픔을 적당히 보상으로 하면서 무마하려고 합니다.
보건학자 김승섭의『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를 보고 우선적으로 느꼈던 점은 탐욕스런 가해자들을 법적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파블로프의 조건반사처럼 그래야만 정의로운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사건이 끝난다고 하면 부조리한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일시적인 사건은 고질적인 폭력입니다. 이러한 폭력에 맞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침묵이나 무관심이 아닙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믿음이며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사건을 이야기하고 기록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미래의 피해자들이 이길 수 있는 면역력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2010년 천안함 사건 때문에 또 한 번 군대의 문제점이 요동쳤습니다. 천안함 사건으로 46명이 순직하고 58명이 구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사건 후 10년이 지나는 동안 정말이지 군대의 취약한 부분이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그럴수록 놀랍게도 이것은 비단 군대만의 부조리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한국 사회의 태도에 관한 중요하고도 예민한 문제로 확대되었습니다. 순직한 46명은 무공훈장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구조된 58명은 패잔병이라는 낙인으로 평생을 고통 속에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인해 피해를 당하고도 자책하고 죄책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사고라는 생(生)의 사각(死角)지대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차별과 혐오라는 생의 사각지대에서 삶의 통제권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것만 해도 견디기 힘든데, 그들은 패잔병이라는 장애(disability)와 치열한 싸움을 벌여 나가야만 했습니다. 능력이 없으니 죽을 수밖에 없는 공포는 최악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자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천안함 사건은 우연히 발생한 군사적 충돌이 아닙니다. 저자는 천안함 생존자들이 ‘패잔병’이라는 것을 고발하면서 거듭 ‘산업재해’를 강조했습니다. 노동자들이 직장에서 근무를 하는 동안 군인들은 군대에서 나라를 지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동’이라는 본질입니다. 군인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무례할 정도로 군인들의 희생을 당연시 했습니다. 하지만 군인 또한 노동자입니다. 노동자에게 산업재해는 최소한 사회 안전망입니다. 충분히 참사와 악몽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고백하자면 천안함 사건을 책임져야 할 가해자들은 ‘악어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피해자들은 겉으로는 괜찮은 척 했지만 속으로는 ‘피눈물’ 흘렸습니다.
만약에 지금의 피해자들이 세월호의 악몽처럼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에 따른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되면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길 수 없습니다. 천안함 같은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동시에 나와는 관계없는 일임에도 공평한 처사를 바랬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상식이 통하는 사회이길 희망했으니까요. 하지만 결과는 이미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장면들이 반복되었습니다. 가해자는 있는데 피해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가해자의 세상 같다는 착각을 일으킵니다.
그런 점에서 피해자들의 고통은 언어로 이야기되어야 합니다. 이야기하면서 슬픔을 전염시키려고 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야기하지 않으면 슬픔을 견디면서 우리 사회의 예민한 질문에 응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