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살아가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적어도 동물적인 본능은 아닐 것이다. 동물에게는 삶의 희망도 의미도 없으니까. 한편으로 인간은 허무를 느낀다. 허무를 좋다고 할 수 없는 것이 허무하다고 하면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어떠한 희망도 없고 의미도 없게 되는 모순에 빠지고 만다. 그런데 허무는 인간에게 거꾸로 작용한다. 허무를 느낀다고 해서 동물적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답게 살아가게 된다.
김영민의『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는 허무의 처방전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뜻밖에도 삶의 답을 허무에서 찾는다. 역설적으로 희망도 의미도 삶의 답이 될 수 없다는 논리를 펼친다. 이유인즉 희망 없이도 사는 게 최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무가 답이라고 한다면 허무 없이 사는 건 최선이 아니다. 바꿔 말하면 허무가 있어야만 최선이라는 것이다. 허무는 삶을 파괴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허무는 삶의 무거운 집착에서 벗어나게 한다. 어디 그뿐인가. 허무는 정신을 단단하게 해준다.
그래서 인간을 ‘호모 불라(homobulla)’라고 정의할 수 있다. 풀이하자면 ‘인간은 거품이다.’는 것이다. 흔히 거품 인생이라고 하면 인생의 덧없음을 부정적으로 떠올리게 마련이다. 인생을 잘못 살았다는 후회가 거품처럼 계속해서 부풀어 오른다. 거품은 허무 그 자체이다. 하지만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가? 언젠가는 거품처럼 사라지는 존재다. 그러니 허무는 인간의 조건이다. 허무 없이 산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저자 말대로 허무는 “인간 영혼의 피 냄새” 같다.
우리가 치열하게 살아가는 데는 여러 가지가 있다. 문제는 치열함 속에 허무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가령, 유명한 사람이 되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공부에는 허무가 없다. 오로지 맹목적인 삶의 목표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공부하는 순간을 즐기는 공부에는 허무가 있다. 공부라는 한계상황에서 오히려 삶의 순간을 즐긴다.
이와 관련된 질문을 저자는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 <소울>에서 답을 찾는다. 재즈의 핵심은 악보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을 즐기면서 즉흥 연주를 얼마나 하느냐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마침내 삶은 악보가 아니라 연주라는 진실을 발견해낸다.
일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목적은 삶의 뚜렷한 나침반 같다. 우리는 보통 목적을 위해 일생을 투자한다. 투자는 곧 돈으로 바뀐다. 하지만 허무적인 관점에서 보면 목적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목적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목적을 위해 사는 것보다는 오히려 목적 없이 사는 게 최선이다. 삶은 과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적이 없다고 해서 삶을 허투루 낭비하는 것은 잘못된 삶이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함으로써 우리는 목적이 없이 조용히 살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인생을 산책하면서 허무를 깨달았다면 인생의 플레너는 필요 없을 것이다.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허무와 더불어 잘 사는 것이다. 이것이 허무한 인생을 더욱 열정적으로 사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