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단어는 보통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가는 감정에 뿌리를 둔다. 일 밖에 모르던 사람이 인생의 임자를 만나 헌신적인 사랑꾼으로 변신한다는 내용은 인기 있는 클리셰로 사용되고, 연애 프로그램에서 일을 우선에 두는 애인을 평가하며 당신을 그만큼 사랑하지 않는 거라 말할 만큼, 사랑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간질거림은 사람만의 언어로 자리 잡아왔다. 작가 미우라 시온은 소설 「사랑 없는 세계」를 통해 지금까지 자리 잡아 온 사랑의 정의를 되묻는다. 그렇다면 작가가 그리는 현실은 사랑 없는 세계일 것이다.
이야기는 기이한 식당 엔푸쿠테이의 점원 후지마루로부터 시작된다. 요리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후지마루가 엔푸쿠테이에 들어가게 된 경위와, 요리밖에 몰랐던 그가 T대 자연과학부 대학원생인 모토무라를 짝사랑하는 과정은 꼭 이 소설의 주인공은 후지마루다, 내가 사랑 없는 세계라 표현했지만, 사람이 아닌 것에 열정을 쏟았던 두 사람이 결국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게 만든다. 나 역시 그런 클리셰를 예상하고 불안불안하며 책을 넘겼지만, 후지마루에게는 강력한 상대가 있었으니, 바로 식물이다.
"식물에는 뇌도 신경도 없어요. 그러니 사고도 감정도 없어요. 인간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개념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도 왕성하게 번식하고 다양한 형태를 취하며 환경에 적응해서 지구 여기저기에서 살고 있어요. 신기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
"그래서 저는 식물을 선택했어요. 사랑 없는 세계를 사는 식물 연구에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누구하고든 만나서 사귀는 일은 할 수 없고, 안 할 거예요."
96p
아직 총 페이지의 1/4도 넘기지 않았는데, 이런 단호한 거절이라니. 남은 페이지 동안 후지마루의 절절한 사랑을 보여주고, 이어줄 속셈인가 머리가 아파진다. 하지만 이야기는 흥미롭게도 후지마루가 아닌, 모토무라에게 집중하기 시작한다. 식물에 대한 사랑으로 후지마루의 고백을 단칼에 거절한 그, 그가 식물을 사랑하게 된 계기부터, 모토무라가 하고 있는, 식물학에 관심이 없다면 이해도 잘 안되는 연구 내용을 줄줄이 꺼내고, 그 안에서 그가 어떻게 그것을 사랑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모토무라 뿐만 아니라 T대 자연과학부 교수부터 대학원생 각자의 식물 사랑을 통해 오히려 사람을 사랑하는 후지무라의 사랑이 별나게 느껴지는 것이다. 심지어 후지무라는 연적인 식물을 질투하고 모토무라의 인생에서 그를 어떻게 이길 것인가 궁리하기보다는, T대 자연과학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모토무라가 키워 온 식물에 대한 사랑과 비슷한 관심을 키우게 된다. 게다가 모토무라의 사랑의 위기를 겪게 되는 순간, 그가 열정을 바치고 있는 요리 경험을 예로 들며 회복할 수 있게 도와주기까지 한다.
사람이 아닌 것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사랑을 하고 있지만 식물이라는 이 생소한 분야에 발을 담가보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이 소설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