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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와 코코

[도서] 하니와 코코

최상희 저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자석을 통해 마주한 부서진 내 삶의 잔해들을 다 토해내고 나니 오롯이 감정만 남았다. 그 감정만 남은 상태가 좋았고, 그 감정을 곱씹는 과정에서 부서진 내 삶을 모아다가 고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로 봉인할 수 있는 궤짝이 아닌, 언제든 꺼내볼 수 있는 타임캡슐에 담아 내 마음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둘 수 있었다.

2017년 연극 나쁜 자석 후기 中


잊거나 잃거나 빼앗긴 조각들을, 우리 모두는 지니고 있다. 아니, 한때 지녔다. 혹은 상실하는 중인지도 모른다.

아직은 남아 있는 소중한 것을 향해, 그들은 가고 있었던 것 같다. 완전히 잃거나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지키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떠난 것이다.

<작가의 말>


아동, 청소년 소설을 읽을 때면 나의 학생 때를 떠올린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 총 12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나는 가상 친구를 오랜 시간 곁에 두며 살기도 했고, 왕따라는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받기도 했으며, 또 어느 날은 전교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화제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다채로운 모습의 학창 시절을 살아왔기 때문이지는 몰라도, 나는 성장이라는 단어에 쉽게 가슴이 뛴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기억은 두 가지로 나뉜다. 도서관을 오고 가며 무서운 속도로 책을 읽어가던 얘, 혹은 학교 축제에서 춤췄던 걔. 하지만 내가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만나는 나는 가장 약한 기억 속에 묻혀있다. 나를 미워했던 누군가, 그리고 그 미움으로 시작된 따돌림. 소외됐던 기억은 나를 늘 무겁게 짓누르고, 누군가 나를 미워하게 되지 않을까 겁내게 만든다. 그렇게 곁을 타의적으로 자의적으로 내주지 않게 되면 탄생하는 게 바로 또 다른 친구, 나다. 나는 나에게 굉장히 친절하고, 한편으로는 괴팍해 남들은 눈으로 하는 말을 입으로 뱉어내기도 하지만 결코 떠나지 않는 유일한 이해자로 존재한다. 나는 중학교 1학년 때까지 그 친구를 놓지 못한 채 살았다.


처음 「하니와 코코」 책을 집어 들고 줄거리를 읽었을 때는 하니와 코코라는 두 아이의 우정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가정 폭력뿐만 아니라 학교에서조차 자기 자리가 없었던 하니가 친절하고 괴팍한 친구인 코코라는 친구를 만나고, 그 친구를 떠나보내는 긴 여정을 그린다. 하니의 삶은 현실과 상상 그 중간 어드메쯤 자리 잡고 있다. 하니, 공여사, 소년 기린이 겪는 가정 폭력은 현실의 잔인함을 그대로 드러내지만, 그 현실을 뒤로하고 공여사와 하니의 여행, 그리고 소년 기린과의 만남과 탈출에는 상상의 요소가 가미된다. 현실이라면 해방과 성장의 기회조차 갖지 못했을 인물들의 기적 같은 행보는 결국 현실을 온전히 마주 보게 만든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부당함이 왜 소설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만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를 묻고 어른이 된 지금의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게 만든다. 자란다는 건, 친절하고 괴팍한 나에게 인사를 보내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나는 어른이 돼서도 나의 친절하고 괴팍한 나에게 제대로 인사를 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를 온전히 떠나보낼 준비가 됐고,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공여사처럼 하니의 친구 코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니가 코코에게 작별을 하는 그 순간까지를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설계도에는 없는 공간, 계획하지 않았던 곳,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아야 했을 방에 하니는 살았다.

<하니>


이 문장은 이 소설의 등장인물인 하니, 공여사, 그리고 기린을 한 번에 꿰뚫는다. 가정 폭력과 학교 폭력의 피해자인 소녀 하니, 남편의 죽음으로 가정 폭력의 굴레에서 막 벗어난 공여사,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규정하지 못한 채 혼란스러워하는 소년 기린. 그들은 사회라는 설계도에서 없는, 계획하지 않은, 존재하지 않아야 했을 존재로 오랜 시간 낙인찍혀왔다. 지금은 과거보다 상황이 많이 개선됐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연초에도 연달아 터지는 성폭행과 가정폭력 가해자들의 솜방망이 처벌과 최근 이슈화된 트랜스젠더 여성의 여대 입학과 관련된 각종 혐오 발언을 보고 있자면, 여전히 이에 대한 발언을 이어나가는 것 밖에 답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 그런 세상이 된 데에는 어른인 나의 나태했던 태도가 한몫했음을 외면할 수 없다. 나 역시 처음에는 페미니즘과 인종과 관련된 문제가 상충됐을 때, 제대로 알아보기보다는 불안을 이유로 인종차별의 발언을 했었던 적이 있고, 그 과거는 지울 수 없는 나의 부끄러움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 이후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의 비판을 똑바로 마주했고,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 알려고 노력했다. 물론 지금 하는 발언들 역시 온전히 옳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과거의 내가 저지른 나와 다른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던지는 말과는 분명 다르다. 하니, 공여사, 기린은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그들의 아픔은 조금씩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니와 기린은 서로의 다른 모습을 왜?라는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지만, 그 중간엔 어른인 공여사가 있었다. 각자의 다름을 받아들인 그들은 함께 바다로 떠났다. 나는 진정한 연대란 「하니와 코코」에서처럼 그들이 함께 바라본 바다와 같은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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