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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밥생활자의 책장

[도서] 혼밥생활자의 책장

김다은 저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혼자는 매력적이다. 혼자는 외롭다. 혼자는 이기적이다. 혼자는 독립적이다. 혼자를 설명할 수 있는 문장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의 수만큼 다양하다. 누군가는 혼자가 되는 것을 꺼리고, 또 누군가는 혼자이고 싶어 발버둥을 친다. 하지만 혼자라는 단어에 머무르다 보면, 나와 같거나 다른 혼자'들'을 마주하게 된다.


'「혼밥생활자의 책장」은 팟캐스트 <혼밥생활자의 책장>를 통해 쌓인 목소리들을 모아, 활자로 꾹꾹 눌러 담은 책이다.


이런 책을 통해 공감과 위로를 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한편엔 한국의 독특한 '흥문화'가 있지 않을까 짐작도 해본다. …그런 유의 사교성과 인간관계를 가져야 좀 더 훌륭한 사회인으로 인정받는 것 같은 묘한 분위기랄까? …그러다 보니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갖거나 사색에 빠져 말없이 있는 것조차 다소 불행하고 비참한 시간으로, 스스로도 '이것은 비정상적이고 좋지 않은 상태, 탈출해야 될 상태'라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래, 다시 시작해보자>



고등학교 때, 나는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책을 읽고, 혼자 운동을 했다. 우연찮게 그런 내 모습을 선생님들이 보게 되면, 친구랑 같이 하지 않느냐며 묘한 말을 남기고 가고는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일이 터졌다. 한 반에서 선생님이 혼자 밥 먹는 얘를 왕따를 당한다 생각해 주의를 줬다 일이 커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사건의 진실은 달랐다. 그 애는 그저 나처럼 혼자 밥을 먹었을 뿐이고, 주의를 준 그 일이 오히려 도화선이 되어 주변 친구들과의 사이가 서먹해졌다고 한다. 이처럼 공동체 생활 속에서 공동체로 존재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너무 쉽게 외로운 사람이라 단정 짓는다. 어른이 된 지금은 과거와 달리 혼자 있어도 왜 남들과 함께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덜 받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혼자 있는 것을 온전히 존중받는지는 의문이다. 혼자임을 존중하는 사람들과 만날 때는 불편함을 겪지 않지만, 불특정 다수와의 만남에서는 혼자는 외롭고, 누군가를 만나야 하며, 하다못해 자주 어떤 모임에 속해야 한다. 그렇기에 여전히 혼자 무언가를 한다고 말할 때면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공격에 대비하면 언제나 이를 유하게 넘길 수 있는 답변 하나를, 날이 추워지면 품 안에 넣고 다니는 현금 삼천 원처럼 가지고 있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누군가의 말을 이해하고 그에 답하는 행위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때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읽히길 원하는 활자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에 의해 소리 내어 불려지길 원하고, 해독되길 기다리는 존재라고 말이다. 나의 스토리를, 나의 존재를 누군가 잘 읽어주길 기다리는 낱말이자 문장이라고 말이다.

당신도 무라카미 라디오를 듣나요? 中



여전히 나는 혼자 무언가를 하기를 좋아하고, 혼자 무언가를 하는 걸 존중받길 원하지만, 종종 정말 혼자인 게 좋아서인지 자신에게 되묻고는 한다. 그 변화는 내가 선택한 자발적인 혼자가 아닌, 타의에 의한 혼자들을 마주하면서였다. 그들을 마주하고, 종종 혼자인 그들과 연대하면서 내가 혼자 지낸 모든 순간이 내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었다는 걸 깨닫게 될 때가 있었다. 단순히 주변의 복잡한 문제에 얽히고 싶지 않다는 회피적인 마음에 혼자가 되기를 선택하기도 했고, 타의에 의해 혼자가 됐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내가 선택했다 믿었던 순간도 있었다. 내가 혼자 잘 살기 위해서는 바로 이유의 경계선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당연히 존중받아야 하는 자의적인 선택으로의 혼자인 순간과 사회적인 차별로 인해 밀려가게 되는 혼자인 순간의 그 미묘한 경계선. 이 질문은 세상에 차별이 사라지는 그날까지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질문과 대답 속에서 나는 앞으로도 혼자로 존재하고 이를 존중받지만, 혼자들의 연대에 언제든 용기 내 발을 뻗을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우리 스스로는 아무 힘없는 개체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개인의 확장성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다. 혼자 잘 살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존재가 돼줘야 할까. 최근 책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갚아주는 법을 다뤘는데, 직장 내에서 불합리한 일이 벌어졌을 때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내가 무슨 힘이 있겠어"라고 하기보다 내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쟤 왜 저래"의 '쟤'가 돼보자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무언가에 대해 발언하고, 바꿀 수 있다는 나에 대한 긍정, 그걸 계속 중요하게 여기며 가져가고 싶다.

사회적 개인주의자의 공중 곡예, <마리끌레르> 2019년 1월호



그래서 나는 묻게 된다. 왜 학교에선 지금까지 이런 걸 가르쳐주지 않았던 걸까? 내신 성적을 올리고, 대입에 성공하기 위한 방법들은 혈안이 되어 가르치면서 왜 사람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방법은, 사회의 문제를 고발하고 싸우는 방법은, 연대하고 주장하는 방법은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일까?

이 순간을 기억하자


나는 이제 알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어른들이 잘못해서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세대가 되어 버렸다. 더는 기성세대를 탓하고 원망할 순 없는 나이가 되었다. 우리는 이제 우리보다 더 어린 세대가 "당신들이 만든 사회에 책임을 지라"는 말을 들을 준비를 해야 한다. 원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덜 부끄러운 기성세대가 되도록 무언가를 해야 하는 위치에 서 있다.

이 순간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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