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에세이를 읽었다. 책 표지가 너무 이뻐서 덜컥 사게 된 것도 있다. 이 책은 박완서 작가님의 산문 660여 편 중 대표작 35편을 선별하여 낸 책이다. 작품 선정에만 몇 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나는 이분의 책은 처음 읽어본다. 각각의 산문들이 짧고 다양한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어서 읽는 내내 지루하지 않았다. 세대의 차이는 있어서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글 속에 담긴 따뜻함이 매우 인상적이었고, 이 책을 계속 읽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생각보다 너무 빨리 읽게 되었다. 작가님이 세상을 떠나신지 올해가 10년째 되는 해다. 이를 맞이하여 작가님의 에세이를 재조명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조금 덜 바빠져야겠다. 너무 한가해 밤이나 낮이나 꿈만 꾸게는 말고, 가끔가끔 단꿈을 즐길 수 있을 만큼만 한가하고 싶다. - p.67
: 나의 바쁨의 정도를 조절할 수 있으면 참 좋을 것 같다. 작가님은 바쁨의 정도를 조절할 수 있으셨나보다.
*다시 꿈을 꾸고 싶다. 절박한 현실 감각에서 놓여나 꿈을 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 조금만 한가해지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 p.69
: 바쁠수록 꿈을 잘 안 꾸게 되는 것 같다. 여유가 많을 때 꿈을 꾸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힘들고 바쁠 때도 꿈을 꾸긴 꾸는데, 즐거운 꿈보단 이상한 개꿈을 많이 꾼다. 일어나서 '꿈이라 진짜 다행이다'라고 생각한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손님을 가장 불편하게 하는 것은 지나친 공경과 관심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잘해주는 친척 집보다 불친절한 여관방을 차라리 편하게 여기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 p.74
: 이 문장을 보니, 매장에 쇼핑할 때 계속 따라다니는 점원이 생각났다. 편안히 나 혼자 구경하고 싶은데, '뭐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라고 물으며 졸졸 따라다니는 점원을 만날 때는 그냥 바로 나와버린다. 거의 줄행랑이다. 무엇이든 적당한 게 좋은 것 같다.
*필요한 것이 알맞게 갖춰져 있고 홀로의 시간이 넉넉히 허락된 편안한 내 방이 언제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아릿한 향수와 깊은 평화를 느낀다. - p.74
: 나는 내 방이 너무 좋다. 아무것도 방해 받지 않고 온전히 쉴 수 있는 공간이다. (나만 이런가) 이 문장이 격하게 공감되었다.
*우리말 중에서 어떤 말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서슴지 않고 대는 말이 있는데 그건 '넉넉하다'는 말이다. (···) '광에서 인심 난다'는 옛말도 말짱 헛것인 게, 있는 사람일수록 더 인색하다. 넉넉하다는 게 남에게 베풀 수 있는 마음이라면, 요새 부자는 늘어나는지 몰라도 넉넉한 사람은 자꾸만 줄어드는 것 같다. - p.87,91
: '넉넉하다'라는 말을 써본지 매우 오래된 것 같다. 안 쓴지 오래돼서 옛날 말처럼 느껴질 정도다.
*아무리 많아도,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줄 생각은커녕 더 빼앗아다가 보탤 생각만 굴뚝같다면 가난뱅이와 무엇이 다를가. '넉넉하다'는 후덕한 우리말이 시어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마음의 부자가 늘어나고 존경받고 사랑받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 p.92
: 저자의 글은 정말 따듯함이 가득하다. 요즘처럼 각박한 사회에서 넉넉한 사람이 되는 게 쉽지 않은 것 같지만 노력해야겠다.
*이렇게 최근의 기억이 형편없이 희미해지는 반면 오래된 젊은 날의 기억은 변함없이 생생하고, 어린 날의 기억 중에는 미세한 부분까지 놀랄 만큼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도 있다. 때로는 그게 정말 있었던 일일까, 상상력이 만들어낸 환상일까 의심스러울 적도 있다. - p.113
: 나도 나이 들면 이럴까? 나는 좋은 기억만 기억하고 안 좋았던 기억은 잊어버리는 것 같다.
*옛 성현의 말씀 중에도 이런 게 있습니다. '이 세상 만물 중에 쓸모없는 물건은 없다. 하물며 인간에 있어서 어찌 취할 게 없는 인간이 있겠는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 있다면 그건 아무도 그의 쓸모를 발견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발견처럼 보람 있고 즐거운 일도 없습니다. - p.136
: 나의 쓸모, 누군가 발견해주기만을 기다리는 것보다 스스로 빨리 찾도록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쓸모를 빨리 찾을 수 있도록 어른들이나, 학교에서 도와준다면 금상첨화겠다. 물론 지금의 우리나라 주입식 교육 과정으로는 힘들어보인다.
*하늘이 낸 것 같은 천재도 성공의 절정에서 세상의 인정이나 갈채를 한 몸에 받는다 해도 그 성취감은 순간이고 그 과정은 길고 고됩니다. 인생도 등산이나 마찬가지로 오르막길은 길고, 절정의 입지는 좁고 누리는 시간도 순간적이니까요. (···) 인생은 결국 과정의 연속일 뿐 결말이 있는 게 아닙니다. 과정을 행복하는 하는 법이 가족이나 친척 친구 이웃 등 만나는 사람과의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것입니다. - p.138
: 너무 공감되는 문장이었다. 아무리 엄청난 성취를 한다해도, 그 순간의 기쁨과 행복은 오래 가지 않는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허무하게 사라져버린다. 저자는 과정의 연속인 인생을 행복하게 살려면 인간관계를 원활히 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나이가 들수록 나와 안 맞는 사람과 억지로 맞추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나와 맞는 사람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표정관리를 잘 못하는 내 성격상, 전자처럼 하는 것도 힘들다.
*인생이란 과정의 연속일 뿐, 이만하면 됐다 싶은 목적지가 있는 건 아닙니다.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사는 게 곧 성공한 인생입니다. - p.139~140
: 내가 좋아하는 말 중에 '카르페 디엠'이 생각났다.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의 라틴어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미루기보다 바로바로 하려고 한다.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주말에 가고, 보고 싶은 게 있으면 바로 찾아보고, 먹고 싶으면 바로 시켜 먹고. (물론 살 찌는 문제가 있다만) 소소한 행복도 바로 이런 것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만하면 됐다 싶은 목적지가 있는 게 아니라면 한결 부담감이 덜하겠다.
*시간이 나를 치유해준 것이다.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깨달은 소중한 체험이 있다면 그건 시간이 해결 못할 악운도 재앙도 없다는 것이다. - p.252
: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닌 것 같다. 작가님이 이렇게까지 말한 부분이니, 시간이라는 약이 있어서 다행인가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