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모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고아를 키워주는 새엄마 느낌으로 이해했었다. 내가 순진했던걸까, 세상이 추악한걸까. 페미니즘을 접한 후에 대리모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더 혼란스러웠다. 모성을 신화화하고 숭배하는 남자들이 대체 왜 대리모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번식 욕망으로 사용하는걸까. 어떨 때는 모성을 버린 여성을 욕하면서 이럴 때는 아무렇지 않게 누군가의 몸을 사고 팔아버리다니.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다.
우리는 보다 나은 삶을 위해 과학이 발전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줄기세포부터 대리모까지 과학이 발전해도 여성의 착취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게 안타까웠다. 여성이 정자은행을 이용해 아이를 가져도 대리모를 통해 태어난 아이와 같은 거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또 정자은행에서 정자 받아 오면 낙인 찍히는 건 여성뿐이겠지. 환멸.) 이 주제로 친구랑 얘기하는데 먼 미래에 나는 시카고 정자은행 출신이야 이러면서 선진국 후진국 정자은행 출신 차별 뭐 이런 얘기도 나오는 거 아니냐며 디스토피아적인 얘길 나눴다ㅠ 이렇게까지 애를 가져야 하나 싶다.
입양된 이들은 자신들이 무력한 재화처럼 거래되었다고 느끼고, 스스로가 거부되었으며 가치 없다는 감각과 낮은 자존감이라는 결과를 안게 된다. 하물며 여기에 더해 아이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미리 친권 포기와 거래가 꼼꼼하게 계획되어 있었다면 이 결과는 얼마나 더 지독할 것인가? 대리모가 해외나 국내 어디에서 이루어지든, 이것이 얼마나 잘 혹은 잘못 진행되든, 확실한 것은 대리모라는 행위를 통해서 우리가 하는 일은 아이를 어른의 재산으로 상정해서 사고판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절박하게 원한다는 것이 그것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 경우는 달라요'는 예나 지금이나 모든 대리모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또 다른 교휸이다. 그들만의 특별한 사례의 가치를 논하는 이들은 개인의 권위에 대한 관점을 앞세운다. 이 관점은 신자유주의적 규제주의 틀 안에 대리모를 위치 짓는 국가나 주 안에서만 성공을 보장한다. 내가 이 책을 통해 주장했듯, 대리모는 아이를 사랑 혹은 돈을 이유로 그를 기른 생모로부터 떼어놓는 행위이며 어떤 '동의'나 '선택'을 들먹인다 해도 이것은 여성의 신체완전성에 대한 침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