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공기 정화에 좋은 식물이라며 무언가를 하나 받았다. 이름은 들었지만 바로 잊어버렸고, 얼마만에 한 번씩 물을 주란 소리도 허투루 들었던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일주일에 한 번씩 녀석을 품에 안고 탕비실로 향한다. 조심스레 물을 끼얹으면서 혹시나 너무 자주 혹은 너무 박하게 물을 주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을 느낀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아직 살아 있다. 부디 앞으로도 그래야만 한다.
오래 전 강아지를 키울 때 외출을 한 번 하려 들면 신경이 쓰였다. 마치 갓난 아기를 홀로 집에 놔두는 듯해 죄책감마저 들었다. ‘애완동물’이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했지만 실상은 ‘반려동물’에 가까웠다. 비록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진 않았지만 때로는 가족보다도 더 가족 같은 모습으로 다가와 내게 안기는데,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식물을 길러볼 생각은 아직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일단 서울을 벗어나 살아본 경험이 없는 나에게 식물은 왠지 어렵다. 성격이 세심하지 않은 것도 괜히 식물을 키운답시고 들였다가 죽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들게 만드는 요인이다. 이런 나에게 ‘반려식물’이라는 단어는 ‘반려동물’보다도 훨씬 난해하게 느껴졌다.
원래 변화는 급격하게 오지 않는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바라보는 부모의 얼굴에서 어제보다 나이가 들었음을 깨닫는 일은 극히 드물다. 움직임이 없다 보아도 무방한 식물로부터 어제와 오늘의 차이점을 읽어내는 일은 불가능하지 싶다. 하지만 나의 이와 같은 생각은 식물 또한 살아 있는 생물임을 망각한 것과도 같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었다. 같은 듯하면서도 다른 식물의 모습으로부터 적잖은 위로를 얻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저자는 말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아미릴리스, 엘라티오르 베고니아, 펠라르고늄, 몬스테라,… 이름부터가 난해했다. 그림이 수록돼 있어 대강의 모양새를 짐작할 수 있었고, 일부는 우리 집 베란다 엄마가 가꾸는 화단에서도 볼 수 있는 듯했음에도 그랬다. 이름을 불러 줄 때 비로소 다가와 하나의 의미가 된다던데, 나에게 이제껏 식물은 의미가 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살짝 들었다. 다정하게 애칭마저 만들어 불러가며 애지중지 식물을 기르는 이들도 존재한다는 걸 감안한다면 난 참으로 무심했다. 이름의 다양함만큼이나 모양새도 제각각이었고, 무엇보다도 성장을 위해 필요로 하는 게 달랐다. 사실 실내는 여러모로 식물이 뿌리내리기에 좋지 않은 환경을 지녔다. 일단 볕이 부족하고, 바람도 거의 불지 않는다. 나비나 벌 등의 등장 가능성도 희박하다. 온실 속의 화초라는 표현이 있듯 이런 공간에서 자란 식물은 아무래도 여리여리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정성을 기울이면 그에 보답하는 게 식물인 듯했다. 책에서 소개된 식물들의 경우에는 대개가 우리나라보다 온화하고 포근한 지역이 고향이었다. 즉, 일정 온도 이하로 기온이 떨어지지 않는 아파트 같은 곳에서도 무난히 성장할 수 있었다. 관건은 물을 얼만큼 주느냐인 듯했다. 어떤 녀석은 흙이 마르지 않도록 수시로 물을 줘야 했지만, 반대로 무책임하다 싶을 정도로 물 주는 걸 잊고 살아야 도리어 잘 성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글로는 이리 썼지만, 정말로 무책임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사랑받길 원하는 건 모든 생물의 본능인데, 식물 또한 예외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식물들이 공기를 정화하고, 심신에 안정을 가져다 주는 효능을 지니고 있었다. 특유의 향이 우울함과 스트레스를 감소시켜 준다는 식물들도 책에 여럿 등장했다. 오늘날 내가 느끼는 극도의 피로감이나 매 순간의 날 선 느낌 또한 식물과 함께 한다면 제거할 수 있을까. 위로 받고 싶은 강렬한 마음에 기대어 반려 식물을 하나 들이자니 왠지 이기적인 것만 같아 망설여진다. 꼭 식물이 아닐지라도 삶에 의미를 가져다 줄 무언가와의 만남을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