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지 않은 시를 읽는다. 반복해 읽으면 이해가 가능할까. 아니, 시를 이해하려 든 것 자체가 잘못일지도 모르겠다. 뇌리를 스친 많은 언어들을 조심스레 주워 담아본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자 했던 바가 무엇인지를 살포시 묻게 된다. 정답은 없다. 해설을 읽을까 하다 말았다. 그 안에 갇히고 싶지가 않았다. 정해진 무언가를 갈구해온 내 자신이 가려는 방향을 심히 잘 알아서 멈추어야만 했다. 차라리 몇몇 시를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궁금증이 일었다. 우린 과연 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가. 나를 둘러싼 세상에 그가 들어와도 이와 같은 시가 완성될 것인가.
때론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꾼다. 마치 삼장법사 손 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손오공 마냥 꿈꾸는 모든 것은 좌절로 귀결된다. 날개가 없어서 날지 못한다고 자조 섞인 목소리를 내뱉는 나와 달리 저자의 의외의 행동을 감행한다.
‘죽음에서 떼어 낸 / 날개를 달고 날아간다’
죽음이란 무어였던가. 내가 소멸로 이해해온 것을 그는 ‘헤매지 않아도 되는 곳’이자 ‘땅만 보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설명한다. 왠지 매혹적이다. 생이 곧 고통은 아닐지라도, 벗어나는 게 실패만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그는 나를 설득하고 있었다.
소년의 심성이 반복됐다. 이제는 딸을 더 선호하는 시대라지만, ‘아들’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내음은 남다르다. ‘고귀한 얼굴을 한 / 가장 아름다운 소년 / 우리 아들 / 우리 아들 / 우리 아들 / 아들 아들 아들’. 씁쓸하지만 이 목소리는 여성의 것이다. 엄마가 꼭 여성이어야만 하는 건 아닐 테지만, 엄마의 역할을 떠안은 이가 남성이라면 왠지 이처럼 말하지는 않을 것 같다. 부모, 특히 엄마에 의해 소년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년이 된다. 급기야 잘못을 고백하는 소년에게 엄마는 당당함을 입힌다. 아들의 고결함은 엄마의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대견함이라는 포장지 밖으로 나올 수 없는, 그것은 보호받는 것일까, 숨 막히는 것일까, 나는 헷갈린다.
여러모로 불편함이 이어졌다. 눈 앞에 그려지는 심상은 왠지 금기에 가까웠고, 심지어 소리조차도 그러했다. 아무도 감지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벽지의 낙하 소리에까지 저자는 귀를 기울인다. 쇠가 울고, 수도관이 진동하며, 공기조차 신음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에너지가 갈 방향을 잃었다고 외친다. 뭉크의 절규가 떠오른다. 세상 모든 존재가 겁에 질린 표정을 하고 있다면, 그 안에서 불안에 떠는 나는 지극히 정상이려나. 정상과 비정상. 선 하나 넘나드는 것에 불과한데, 이를 기어코 재단하려 드는 내가 우습다. 동시에, 불편함을 모두가 공유하는 감정이라고, 다른 이들도 힘드니 징징대지 말고 침묵하라고 요구하는 사회란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인가를 묻게 된다. 완전무결에 가까운 존재로 그려진 엄마조차도, 백 번 구하려 들었으나 백 번 다 구하지 못할 대상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타인의 도움에 이끌려서가 아니라, 엄마 스스로가 탈출을 시도해야만 한다고. 이는 비단 엄마에게만 주어진 과업이 아니라고.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우리는 ‘아이고’라 소리친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건 떨쳐내기다. 달리다 말고 돌아오는 너에게 걱정 말고 “달려가”라고. 그 끝에서 다른 너와 내가 비로소 하나될 수 있다고. 당신이 스스로 알을 깨고 성장하는 동안 나 역시 지금과는 사뭇 다른 존재로 거듭나겠다고. 너 그리고 나 모두가 지금과 다른 모습이 되어 만나 “그대여”를 외치는 순간의 환희를 상상하자는 저자의 제안에 마음이 흔들린다. 나는 지금 무엇이 하고 싶은가. 나를 부정함으로써 진정한 나로 거듭나는 일을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은가!
물음은 끊이질 않는다. 정답은 결코 없다. 다시 한 번 강렬히 묻는다. 당신은 하고 싶은 게 무언가. 나는, 우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