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누가 누구를 버리는가’의 문제다. 약간의 혼미한 마음이 걷히자 이내 작품에 대한 간략한 정의가 가능해졌다. 여전히 인물의 선악 여부를 판단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 ‘입체적’이라는 평을 이럴 때 사용할 수 있을 듯. 젊은 일본인 작가가 선사한 파장은 생각보다 거대했다.
주인공 타테이 준키가 가진 거라곤 젊음뿐이었다. 어머니는 사망했으며, 아버지는 집을 나가 오래도록 연락이 닿지 않는 상태이다. 머무는 곳은 어딘지 모르게 퇴폐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돈을 벌어 그럴싸한 거주지를 마련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지만, 허리를 다쳐 일을 할 수 없는데다 치료도 받기 어려운 처지다. 상황 반전의 가능성이 보이질 않는다. 급기야 이대로 삶을 마감하는 게 최선 같다는 방향으로 사고가 이어진다. 그 순간 그를 향해 한 인물을 손을 내밀었다. 이름은 타카기 켄스케. 그 대신 자신으로 살아달라는 기괴한 제안은 매력적이었다. 막 대학에 합격해 놓은 상태요, 건강보험 가입도 돼 있어 그간 미룰 수밖에 없었던 허리 치료도 가능하다. 게다가 말짱한 집도 있다. 켄스케는 하늘이 보내준 구세주일까. 스물스물 피어 오르는 미심쩍음은 갑자기 켄스케가 사라지면서 거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 길로 준키는 탐정이라도 되는 것마냥 켄스케의 정체성을 파고 들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뼈대를 구성하는 건 준키가 켄스케에 대해 알고자 애쓰는 과정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매우 단조롭게 느껴질 수도 있다. 켄스케의 정체성이 밝혀지는 순간 모든 흐름은 중단될 수밖에 없는 만큼 저자는 적잖은 위험을 짊어진 상태이다. 그럼에도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준키가 알고자 하는 켄스케는 물론, 실상 독자들로서는 준키의 정체성조차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탓이다. 왜 이 젊은 청년이 부모를 잃고 혼자가 됐는지,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부재부터가 의문스럽다. 준키가 입을 열지 않는 이상 진실은 밝혀지기 힘든 구조다. 일부러 숨기려 드는 건 아니나 혹여나 부모에게 먹칠을 할까 우려하는 것처럼 이 인물은 스스로에 대해 말을 아낀다. 저자가 직접 제시하는 약간의 정보에 기대는 게 독자로선 최선이다. 켄스케의 존재 또한 생각보다 단단하다. 그의 생계 유지를 가능케 하는 돈의 출처가 어딘지, 왜 실명을 감추는 것에서 더 나아가 아예 신분을 남에게 양도하면서까지 스스로를 부인하려 드는지. 독자의 궁금증은 준키를 통해서만 해소 가능하지만, 준키 또한 켄스케가 침묵하므로 아는 바가 없다. 이 인물이 직접 써 내려갔다는 의문의 소설이 유일한 단서다.
인간의 호기심이 얼마나 강렬할 수 있는지,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향해 다가서는 준키의 모습을 보며 다시금 깨달았다. 다소 신파극 분위기가 연출될 수도 있는 출생의 비밀이 등장하는 순간 실망할 뻔하였으나, 저자는 거대한 악의 기운을 설파하며 이를 뒤덮어 버린다. 내면에 이는 분노, 적대감 등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나, 사람이 사람을 죽일 정도로 거대해진 감정이 빚어낼 수 있는 비극은 막강했다. 하지만 우리가 알려 들었던 인물을 ‘절대 악’으로 정의하려 드는 순간 저자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든다. A라는 인물이 사람을 죽였다는 엄연한 진리는 순식간에 왜곡되고, 독자들은 혼미해진 정신상태에 빠진 등장인물과 닮은꼴이 된 양 결과를 쉬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죽은 사람만 불쌍한가 하면 또 그건 아니다. 악함이 악함을 단죄하는 기가 막히는 현실, 누구와 어느 선에서 타협하면 좋을지, 생각이 많아진다.
나는 결코 유혹에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단정은 금물이다. 모든 인물에겐 선택으로 낳은 결과가 어느 편으로 기울어져 있느냐를 떠나 나름의 정당화 이유가 존재한다. 준키, 켄스케, 준키의 아버지, 모두가 그러했다. 고로 나는 다소 무책임한 태도라는 평을 들을지도 모르나 선언하다.
“소설이라 다행이다”
한 발 물러나 팔짱 낀 채 이 모든 과정을 접할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어 진정 다행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