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X 열차에 몸을 실었다. 쉴 틈 없이 뒤로 밀리는 풍경이 하나의 흐름처럼 읽혔다. 날아가는 새, 흐르는 물 등을 세세하게 살피기 힘들었다. 대신 목적지에서 보다 많은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하나를 취하려면 다른 것들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유독 한국인들은 시간과의 사투에 능하다. 오늘 저녁에 주문한 상품을 내일 아침에 받아야 한다. 어떠한 분야든 정해진 기한보다 일찍 마무리 지어야 능력 있다는 평을 듣는다. 그리하여 가족에게 더 충실할 수 있다거나 나만의 취미 활동에 몰입하게 된다면 좋으련만, 또 다른 일이 주어지고 아예 스스로가 다른 일감을 향해 손을 뻗는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비움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나태나 게으름으로 해석하지 않을 수 있어야만 한다.
사진 촬영을 즐겨 하는 이들이 거대한 망원렌즈를 짊어진 채 북녘땅이 빤히 보이는 철원으로 향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 중에는 사진 작가도 있을 터이나, 취미 삼아 사진 촬영에 임한 이들도 상당수일 거다. 그래서일까. 저자의 이력을 살피던 나는 ‘새를 관찰하는 게 일이 될 수도 있구나’ 생각했다. 새는 우리의 통제 영역 밖에 존재한다. 카메라를 설치하고 한 발 뒤로 물러나 최대한 숨 죽여가며 새의 등장을 기다려야만 순간을 포착할 수 있다. 낚시도 비슷한 행위다. 낚싯대를 드리운 채 세월아 네월아, 난 그 길고 긴 시간을 버틸 자신이 없다.
책의 내용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했다. 무가치하다 여겨온 많은 것들이 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품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는데, 단지 개인 차원에서 기울이는 노력은 미진하기 마련이다. 평가는 상대적이다. 최고 속도를 내어 내가 달리고 있을지라도 다른 이들이 오토바이에 몸을 실은 상태라면 난 뒤쳐진 존재로 해석된다. 주변 질서를 외면한 채 내 페이스를 유지하거나, 다른 이들이 나의 움직임에 동참하게끔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저자는 글을 쓰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 자판을 두드렸을 것이요, 출판을 위해 연락을 취할 때면 스마트폰을 사용했을 것이다.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면 삶이 너무 퍽퍽해진다. 그가 택한 건 일종의 시선 비틀기였다. 우리의 삶이, 우리가 진보라 믿어왔던 많은 것들이 알고 보면 파괴일 수도 있음을 꼬집었다. 이는 우리 도시가 지닌 역사를 연상시켰다. 다닥다닥 붙은 옛 주거지가 얼마나 쉬이 무너졌던가. 그렇게 탄생한 높은 아파트가 누군가에겐 새 집이 되어 주었지만, 주거지 상실의 아픔을 겪은 이들도 꽤 여럿 존재한다. ‘창조적 파괴’라는 용어는 매우 무책임하게 들린다.
70시간 가까이 일애 매진해온 레비 펠릭스가 디지털 디톡스 주창자의 길을 걷게 된 사례가 언급됐다. 건강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휴식의 중요성에 눈을 뜨다니, 참으로 역설적이다. 심지어 그렇게 창출된 휴식이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계층을 위한 향유 상품화한 점은 우리 자신이 생산성에 퍽이나 매달리는 편임을 보여주는 듯했다. “안 하는 쪽을 택하겠습니다”를 반복한 끝에 감옥에 갇힌 필경사 바틀비의 이야기는 거부가 세상으로부터 받아들여지기 얼마나 힘든 행위인지를 보여준다. 세상의 질서를 거부하지도, 그렇다고 세상에 적극적으로 속하지도 않았던 디오게네스는 어쩌면 시대가 낳은 산물일 수도 있다. 그를 포용할 수 있는 관대함을 지닌 시대, 디오게네스의 시대는 오늘날과 달랐음이 분명하다.
누구와도 교류가 어려운 자연 한가운데 홀로 파묻혀 사는 괴짜가 될 자신은 없다. 삶에 조금 덜 조바심을 내고, 가끔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것으로 소심한 복수를 취해볼까 한다. 이름 모를 새가 한 마리 날고 있다면 저자가 이 책의 말미에 이야기한 갈색펠리컨을 상상할 것이다. 도시와 펠리컨은 심히 안 어울리지만, 부자연스럽다는 사고 또한 어쩌면 강요된 것일지 모른다는 의구심에 기대어 내게 무한한 자유를 선사하고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