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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크린 나에게 식물이 말을 걸었다

[도서] 웅크린 나에게 식물이 말을 걸었다

정재은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점차 사람이 필요 없는 시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어서일까. 가정 내에서도 부대끼는 인원이 현격히 줄어드는 요즘이다. 대신, 인간 아닌 것들이 삶의 의미를 나누는 존재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누가 뭐라 하여도 식구인 반려동물을 위한 다양한 서비스를 접할 때마다 세상이 달라졌음을 깨닫는다. 이보다 좀 더 앞선 이들도 있다. 동물 아닌 식물을 동반자로 맞아들인 이들도 제법 된다. 외출을 할 때면 마치 어린 아기를 홀로 집에 놔두고 떠나는 것만 같은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는 반려동물에 비해 반려식물이라면 마음이 조금은 편할 것만 같다. 상대적으로 신경을 덜 써도 무방한 존재로 식물을 상정하는 건 무책임한 태도일 터이나, 적어도 내겐 동물보단 식물이 약간일지라도 부담이 덜 하지 싶다.

손이 닿는 족족 식물이 메말라 죽는 경험이 몇 차례 반복되자, 저자는 스스로를 식물 킬러라 칭했다. 이른바 손이 무딘 경우라 할 수 있는데, 사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이유로 식물을 들였더라면 나 역시도 그와 유사한 길을 걸었을 듯하다. 가만 놔두면 알아서 잘 자라는 무언가는 없다. 사람의 성격이 저마다 다르듯 식물 또한 세심한 손길을 필요로 한다. 간단하게는 물을 많이 필요로 하는 녀석과 그렇지 않은 녀석, 빛을 충분히 쐬어주어야 하는 녀석과 어둠을 선호하는 녀석 등. 그 습성을 온전히 알지 못하거나 무시한다면 살아 있어도 비실비실, 그야말로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임을 식물들은 온몸으로 증명해 보인다. 실수로부터 모든 존재의 고결함을 지켜내기 위해 필요한 노력을 학습할 수 있으면 참 좋으련만, 아직 난 그 부분에서 많이 부족하다.

이야기는 겨울에서 출발했다. 겨울--여름-가을. 한 사람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계절을 함께 지내보라는 조언이 떠올랐다. 보통은 을 모든 것의 시작이라 여기는데, 왜 저자는 겨울을 시작지점으로 삼았을지도 궁금했다. 겨울은 어둠이 유독 짙은 계절이다. 나름의 따사로움을 지녔으나 여느 계절보다 길이가 짧은 볕은 삭막함을 연상시킨다. 아마 당신의 화분에선 어떠한 푸른빛도 아니 읽힐 수 있다. 아무것도 없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겠으나, 실상 이 계절 동안 생명체는 다가올 시기를 준비한다. 모두가 무성한 생명력을 뽐낼 기회를 부여 받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으므로 희망을 품는 건 자유다. 이 계절을 어찌 보내느냐에 따라 앞으로가 결정된다. 누군가에게 어떠한 이름으로 불리는 경험이 주어질지를 상상하는 재미가 쏠쏠한 계절이 바로 겨울이다.

이젠 열 손가락을 모두 꼽아도 헤아림이 불가능할 만큼 사계절을 반복해 살아온 나다. 그만큼 전형적인 봄 여름 가을 겨울 날씨에 대해서는 안다 여겨왔는데, ‘안다의 정의에 대해 다시금 고민케 됐다. 저자에게도 낯설었을, 허나 지금은 꽤 자연스레 페이지에 수록한 식물들의 이름을 소리 내어 읽어 보았다. 사진이 없으므로 내 맘껏 상상했다. 보통은 모습을 통해 이름을 유추하곤 하는데, 내 경우엔 반대였다. 알지 못하기에 분명 틀렸을 것이나, 적어도 그리 상상해낸 모습들은 한결 같이 청량했다. 어쩌면 이는 사람들이 실내에서 무언가를 키우는 까닭에 지나치게 경도된 나의 사고가 빚어낸 그릇된 사고일 수도. 설령 현실이 그럴지라도 굳이 틀린 부분을 바로잡으려 들진 않았다. 오히려 식물들이 품은 관대함이 나의 무지를 용서해줄 거라 믿었다. 정확히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상대를 향한 예의가 분명하지만, 식물 특유의 너그러움을 향한 믿음이 내 경우엔 좀 더 강했던 모양이다. 어찌 부르든 적잖은 위안을 선사하는, 푸른빛은 진정 축복이었다.

우리 집엔 유독 화분이 많다. 소위 똥손인 나와 다르게 엄마는 꽤나 오래 전부터 이름 모를 화초들을 집에 들이셨다. 좀체 꽃을 틔우지 않는다는 동양란조차도, 마치 물 만난 물고기 마냥 화려함을 뽐내는 일이 여러 차례였다. 지난 4월 큰일을 당해 며칠간 집을 비웠다. 아직 날이 후덥지근한 시점도 아니요, 떠난 사람의 빈자리에 휘청이느라 방치된 식물의 존재는 잊고 살았다. 장례식장에서 겨우 벗어나 약간은 허한 집안에 들어섰을 때 향기를 넘어선 독기가 온 집안 가득 풍기는 것만 같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환기를 여러 날 시키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그 때는 녀석들이 나를 비난하는 것만 같았다. 왜 자신들을 돌보지 않았느냐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어딘가에서 울려 퍼지는 듯도 했다. 이젠 녀석들도 인간의 제 나름의 방식으로 내 슬픔에 힘을 보탰음을 잘 안다. 인간이 소리 내어 우는 것처럼 식물도 슬픔을 토로했다고 지금은 생각한다. 아마 이 터널에 끝은 없을 듯하다. 베란다에 나설 때마다 나도 모르게 응시하게 되는 녀석들의 응원에 힘입어 서서히, 어제보다 오늘 난 나아졌고, 아마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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