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틀린 무언가가 있다면 시작 지점을 발견하는 일이 중요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됐는지를 파악할 때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도 보이기 때문이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왜곡된 사관이 어느 시점에 어떻게 적용됐는지를 깨달을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게 가능해진다. 안타깝게도 역사에는 정답이 없다. 누가 해석하느냐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정답인 것이 다른 이에게는 오답이기도 하다. 결국 보다 많은 힘을 지닌 이의 역사가 진리로 통용되고, 힘의 역학 구도가 뒤바뀌면 역사 또한 달라진다.
당장 100년, 아니 50년만을 놓고 보아도 입장이 첨예하게 갈린다. 하물며 1,300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을 경우에는 논쟁이 더욱 극렬하기 마련이다. 때는 7말 8초. 견고함을 유지할 것만 같던 고구려-백제-신라의 대결구도가 무너졌다. 드넓은 대륙에선 발해가 당나라, 거란과의 패권을 다투었으며, 조금 더 멀리서는 돌궐, 토번 등이 저마다 호시탐탐 세력 확장을 노리고 있었다. 지도의 모양새로 짐작하기론 절대 강자가 없는 시대 같다. 높은 긴장도를 저마다 유지한 채 치고 나갈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을 것이다. 비등비등한 힘은 후대에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저마다 자신이 계승한 세력이 최고였음을 주장하는데, 이는 오로지 과거에만 머무는 다툼이 결코 아니다. 지난날의 강대함은 오늘날의 강성함을 정당화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는 한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든든하게 다지고, 더 나아가 튼튼한 미래를 건설하려는 각국의 노력은 그야말로 눈물겹다.
많은 이들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이 땅에서 활개를 치면서부터 역사가 왜곡됐다는 식의 입장을 견지한다. 저자는 역사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왜곡되어져’ 왔다는 전제 하에 동아시아 역사 전체를 훑기 시작했다. 언제, 왜, 무엇을, 누가, 어디서, 어떻게 라는 요소가 단계를 거치면서 어떻게 왜곡이 되는지, 진화 아닌 진화를 논하는 진지함에 혀를 내두르고야 말았다. 변곡의 가능성은 실로 놀라웠다. 어느 한 지점을 놓치면 다음의 흐름을 따르기란 더더욱 힘들 게 분명했다. 왜곡을 왜곡 아닌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일명 ‘왜곡 차수’를 노릴 필요가 있어 보였다. 교묘하게 차수 사이를 공략해 비틂으로써 사실 아닌 것이 사실로 얼마든지 등극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저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는 당대 동아시아 사람들이 합심해 만든 하나의 룰(rule)이었다고 주장했다. 아니, 합심이라는 단어는 옳지 않을 수도 있다. 왜곡을 주도하는 세력은 분명 존재했으니, 아마도 중원을 장악한 당나라가 앞장섰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힘에 의한 동의, 즉, 강압에 따라 주변 국들은 속내가 어떠하건 동의를 했을 것이요, 시작은 날조였으나 어느 시점부터는 모두의 믿음을 획득한 역사가 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됐을 것이다. 기존에 접해온 내용과 사뭇 다르기에 솔직히 말하자면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았다. 예를 들자면, ‘고구리의 부활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인해 ‘고구리’에 관련되는 국호를 모조리 ‘고구려’로 바꾸었다는 이야기와 고구려 역사를 축소하려는 시도 간의 상관관계가 내겐 잘 읽히지 않았으며, 삼한, 즉, 마한, 변한, 진한의 실체에 관한 이야기 또한 많이 낯설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걸 의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있게 만든 뿌리에 대한 근원적 의문을 품어야 함을 의미했기에 조심스러웠다. 존재하는 모든 걸 의심함으로써 나는 과연 어디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허나, 그렇기에 왜곡의 자행에 동조하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이를 옹호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비슷한 원리에 따라 도처에서 왜곡의 시도가 행해지고 있음을 저자는 꼬집었다. 역사를 왜곡하고, 나아가 이를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삼는 행태를 필히 경계해야 함을 주문키도 하였다. 비록 그릇된 역사일지라도 이로부터 배우고, 이를 딛고 일어날 필요가 있다. 모든 걸 바로잡지 못한다 하여 계속해서 뒤틀린 삶을 이어 나가는 건 옳지 않다. 무엇이 옳고 또 그른가를 인식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행해져야 할 시기 같다.
** 본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남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