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동기가 안 읽히는 무차별적 성향의 범죄가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다. ‘이상동기 범죄’라는 도통 입에 달라붙지 않는 명칭을 접할 때마다 인간 진보에 대한 일말의 믿음이 흔들리고는 한다. 이제껏 인류가 많은 걸 이루어 왔다는 사실만은 부정하기 힘들다. 허나 눈부신 과학의 발달이 곧 인간성의 진화를 뜻하지는 않음을, 인류애에 반하는 사건들이 발생할 적이면 슬프게도 난 깨닫는다.
인간이 다른 종보다 우위를 점하는 게 당연하다는 시각은 꽤나 이른 시기에 태동했다. 오늘날 학문의 뼈대를 구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 또한 같은 맥락이라 하겠다. 모든 존재에는 우열이 있고, 최정점을 점하고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건 과학적 진리이기에 앞서 희망사항일지도 모른다.
아이를 안 낳는 사회가 도래했다고는 하나, 우리나라를 넘어 전 세계 인류가 절멸을 하는 일은 무척 오랜 후에나 발생할 거 같다. 앞서 많은 위기를 겪을 때마다 운이 좋거나, 지혜를 발휘했거나, 어떠한 이유가 됐건 극복해온 인류의 능력을 많은 이들은 신뢰하고 있다. 저자는 이룩한 모든 걸 부정하는 건 아니나 그렇다 하여 인류의 유일성을 무한 긍정할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오히려 그는 우리, 즉 호모 사피엔스 또한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렇게 말하면 왠지 인간을 얕잡아 보는 것만 같아 기분이 상한다. 더 나아가 불경함을 이유로 목숨을 잃을 뻔한 많은 진화론자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다윈의 손을 들어주는 일은 머리로는 얼마든지 행할 수 있을 듯한데, 막상 이를 긍정하려 들면 쉽지가 않다. 왠지 우리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하락시키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저자가 주목한 건 유사성 같다. 숱한 종이 오로지 인간만의 특성으로 이야기되어 온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다. 비록 인간의 시선에선 모든 걸 해석하기가 버겁겠지만, 성실한 관찰은 오히려 우리 자신과 여타 종 사이의 차이점이 생각만큼 크지가 않다는 지점으로 우리를 데려다 준다. 일례로, 오늘날 보편화 돼 있는 양육을 사회에서 책임진다거나 조부모 등의 도움에 기대는 현상을 저자는 ‘탁란’과 동시에 언급했다. 남의 둥지에 알을 낳는, 얼핏 느끼기에 굉장히 이기적인 행위를 하는 몇몇 종류의 모습과 인간을 단순 비교하는 게 과연 옳은가의 문제를 떠나, 어쩌면 오로지 부모 두 사람의 노력만으로 아이를 기르는 일은 애초부터 불가능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예 지난날에는 온 마을이 나서서 아이의 성장을 도왔고, 가족의 형태 또한 조부모 혹은 그 이상 세대까지 한데 어우러져 지냈다. 그 시절엔 꼭 부모가 아니어도 아이 곁에는 늘 누군가가 있게 마련이었다. 죄악, 치료를 필요로 하는 행위나 결핍 등으로 치부되기 일쑤인 동성애를 둘러싼 문제 또한 오로지 인간만이 겪는 게 아니었다. 약한 수컷이 암컷으로 오인되어, 한 성의 개체수가 줄어듦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특정 균의 감염에 의하여 등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동물들 사이에서도 동성애는 종종 관찰된다고 저자는 말했다. 아예 동성애가 먼저 존재했다는 식의 파격적인 전제를 거론하기도 하였으니, 옳고 그름의 여부를 떠나 혹 다른 종 안에서도 이를 둘러싼 논란이 인간 사회에서와 같이 첨예할지가 궁금했다.
“고귀하고 아름다운 천상에 인간의 자리는 없다. 인간은 동물의 왕국 어딘가에 있다.”
감히! 오로지 신에 의해 창조된 인간의 고결함을 깎아 내리는 태도이자 신의 위대함에 대한 반발이라고 적잖은 사람들은 반발할 듯도 하다. 진정 위대한 신은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종도 창조했을 것이요, 인간이 오늘날 겪고 있는 문제가 오로지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면 심오한 문제일지라도 도처에서 해결을 위한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뜻하므로 긍정적이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사고를 ‘인간’이라는 틀 안에 가두는 오만으로 인해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는 결과를 이제껏 끌어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리는 과연 어디 즈음일까. 우리 스스로 떠나온 우리의 보금자리가 아직 우리에게 열린 형태로 남아 있을지, 당장에는 퇴보처럼 느껴질지도 모를 제자리로의 회귀를 통해 우리는 과연 지금보다 희망찬 미래를 예비할 수 있을지. 겸허히 모든 걸 수용하기 위하여 이제부터라도 마음을 갉고 닦아야겠단 생각을 했다. 더불어 사는, 더는 인간이라는 이유로 외롭지 않기 위해서 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