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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준의 인문 건축 기행

[도서] 유현준의 인문 건축 기행

유현준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책은 저자의 생각이 문자로 기록된 결정체다. 음악은 작곡자의 생각이 소리로 기록된 결정체다. 건축은 건축가의 생각이 공간으로 기록된 결정체다. -p483~484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도구가 존재한다. 건축을 도구로 칭하는 게 실례일 수도 있겠으나, 건축가는 공간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담기 위한 도구로서 건축을 활용한다. 특정 공간에 들어섰을 때 우린 차가운 구조물과만 만나는 게 아니다. 와 닿지 않을 순 있어도, 그 안에는 한 사람의 모든 게 집약돼 있다. 차가움으로부터 끓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과 사뭇 다를 것이다. 안타깝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경지에 이르러야만 건축가의 철학이라 하는 걸 느낄 수 있는 거 같단 생각을 요즘 들어 왕왕 한다. 이른바 ‘순살 아파트’의 출현 탓이 크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다 많은 수익의 창출은 생존을 위해 당연히 추구되어야 하는 바다. 그러나 많은 사람의 목숨이 왔다갔다할 수도 있는 중대한 사안을 오로지 돈에 심취한 나머지 그리도 쉽게 포기하는 건 용납이 어렵다. 철학은커녕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공간에 우리 자신이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그렇게 우리 또한 생명체가 아닌 것으로 격하되고 있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전 세계 유수의 건축물과 만날 수 있어 희열이 컸다. 살면서 직접 닿을 가능성이 무척이나 희박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개별 건축물들의 존재 자체를 인식하는 것마저도 내겐 버거운데, 이렇게 책 한 권을 읽음으로써 모든 걸 섭렵할 수 있다니, 나로서는 누릴 수 있는 모든 사치를 누린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저자의 의도대로, 지도에 표기된 위치를 보며 나는 개별 건물들의 위치와 더불어 건축물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나 주변 환경 등 다양한 요소들에 대해 일단 상상할 수 있었다. 옳건 그릇됐건 정보를 접하기에 앞서 행한 상상의 시간은 책에 대한 흥미를 드높이기에 충분했으니, 이는 마치 여행을 앞두고 계획을 세우며 설렘을 느끼는 것과 흡사했다.

내겐 낯선 이름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럼에도 몇몇 이들의 존재는 독보적이었다. 그 중 르 코르뷔;지에는 단연 으뜸이었다. 사실 나는 이 인물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다. ‘집은 살기 위한 기계’라는 그의 사고가 반영된 결과물은 효율성을 강조한 측면이 강했고, 우리나라의 멋없는 아파트 또한 그의 철학에서 비롯됐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개성이 출중한 건물들과 견주었을 때 그의 작품은 밋밋함이 짙다는 게 나의 생각이었는데, 책을 읽으며 내가 이 인물에 대해 일부만을 알고 있었고, 어쩌면 크게 오해하고 있었던 듯도 하단 생각이 들었다.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아직 전형적인 르 코르뷔지에다운 건축물을 만들던 시절에 지어졌다. 주변의 야트막한, 유럽을 연상시키는 붉은 지붕을 지닌 집들과 비교했을 때 과도하게 우뚝 솟은 이 건물은 위압적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런데 내가 간과한 게 있었다. 몬드리안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빨강, 파랑, 노랑, 초록 페인트의 나열이 이 건물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었다. 위 아래 양옆 집과는 다른 나만의 고유한 공간을 확보했다는 생각을, 온전히 개성을 누리고 있다는 자부심을 거주자들에게 부여하는 지점이 우리나라의 아파트와는 달랐다. 후대에 그는 보다 친자연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저자가 심히 감탄했다는 라 투레트 수도원은 창문을 통해 얼마든지 자연을 누릴 수 있게끔 설계됐다. 고작 1.83미터의 폭을 지닌 사제의 공간에서는, 면적으로는 최소한의 공간이었으나, 마치 모든 게 갖추어진 것만 같은 넉넉함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독일 국회의사당을 소개하며 던진 ‘일본 건축가가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설계한다면’이라는 저자의 발칙한 질문에 한동안 할 말을 잃었다. 역사를 바로잡는 노력은 등한시 여기면서 필요에 따라 특정 감정을 선도하는 분위기가 우리나라에선 자주 형성된다. 굳이 일본 건축가일 필요는 없으나, 건축가의 국적이 일본이라는 이유로 존재와 가능성을 부정하는 일이 어떠한 결과를 낳을지를 묻게 됐다. 엄연히 존재하는 제약을 타도의 대상으로만 여기지 않고, 이를 활용함으로써 오히려 더욱 생명력 넘치는 건축물을 낳은 타국의 사례에 대한 부러움도 들었다. 파괴는 그야말로 우리 자신이 택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인데, 여전히 우리는 창조를 위해 때려부수어야 한다는 일말의 믿음을 간직한 듯 굴고 있다.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지 싶었다.

풍요로움을 과시하는 것과 패배와 상실의 쓰라림을 기리는 것 등 공간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시도는 다양했다. 상대적으로 우리의 공간은 침묵하는 경향이 짙은 듯했다. 잠들어 있는 이야기들을 되살리는 일은 건축가들만의 몫이 아닐 거다. 인문 건축 기행. 이질적인 단어 간의 만남을 온전히 즐기는 독자들에 힘입어 우리의 공간들도 말할 수 있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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