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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명의 완벽주의자

[도서] 네 명의 완벽주의자

이동귀,손하림,김서영 저

내용 평점 3점

구성 평점 4점

타인과의 경쟁을 거듭하다 보면 왠지 더 나은 내가 되는 듯도 하다. 보고 듣고 느끼는 바가 많은 만큼 성장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매순간 더해지는 나에 대한 평가는 스트레스 요인으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최선을 다할지라도 어딘가 부족한 부분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나의 결핍을 채우는 게 가능할지, 반복되는 고민에도 불구하고 해법을 찾는 일은 버겁다. 급기야 난 뭔 짓을 해도 안 되는 놈인가 보다며 자책을 하기 일쑤다. 실수 한 번이 내 전부를 망가뜨려서는 곤란하지만 완벽하지 못한 자신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가 않다. 완벽주의가 끝끝내 나를 갉아먹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네 명의 완벽주의자’라는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땐 역사 속 혹은 현존 인물들의 사례를 살펴보는 줄로만 알았다. 저명한 이들이 완벽주의로 인해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혹은 완벽주의를 디딤돌 삼아 어떻게 성장을 일궈 냈는지 등을 알게 될 거라 기대했다. 저자가 네 명으로 지칭한 건 완벽주의의 네 가지 유형이었으므로, 곧 나의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는 전개됐다. 완벽주의에 대해 그토록 세심하게 살펴볼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일단 놀랐다.

완벽주의를 유형별로 구분하여 설명하기에 앞서 저자는 완벽주의가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했다. 행복한 완벽주의자와 불행한 완벽주의자라는 두 가지의 구분은 단순하면서도 이해가 쉬웠다. 완벽주의 자체가 나쁘다거나 무조건 부정적인 영향만을 미치는 건 아니라는 걸 저자는 알기 쉽게 충분히 풀어냈다. 그 다음으로 저자는 완벽주의의 다양한 원인을 언급했다. 저자는 총 다섯 가지의 요소를 언급하였는데, 이를 읽는 나는 본성과 학습이라는 두 개의 축을 떠올렸다. 사실 저자의 다섯 요소는 환경적인 측면으로 다소 치우친 경향이 있다. 부모가 자녀에게 높은 기대감을 품고 은연중에 자신의 의도를 언행으로 매순간 보인다는 아무래도 저자는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비현실적이다 싶을 만큼의 높은 기준을 설정하는 것과 스스로 성취한 부분이 제 능력에 따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며 의심하는 등의 태도 또한 잦은 부정의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측면이 존재한다. 정리 정돈 습관의 경우도 마찬가지. 우연에 불과할지라도 결과가 훌륭했다면 다소 무리수와도 같아 보이는 연결고리를 찾고 특정 행동을 고수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 또한 경험으로부터 (비록 그릇된 방식이긴 하나) 학습의 필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일 때가 많다. 하지만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기질 자체가 완벽주의라면? 내 경우가 그러했다. 누구도 내게 그리 퍽퍽하게 살아야 한다 강요치 않는데 내 자신이 불안해서, 만족을 못 하겠어서 끊임없이 염려하는 모습을 보이곤 해왔다. 이런 나는 과연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독서를 나에 대한 이해의 기회로 삼으려 들었던 것 자체가 욕심일지 모르지만, 난 지금 이 순간 나를 진심을 알고 싶었다. 왜 늘 자신을 들들 볶을 수밖에 없는지가 궁금했으며, 꼭 그래야만 하는지를 묻고 싶었다.

저자가 제시한 다섯 가지 유형 중 굳이 고르라면 나는 눈치백단 인정추구형에 방탄조끼 안전지향형을 섞어 놓았지 싶었다. 기준이 나 아닌 타인에게 있곤 했다. 타인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세상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며 우려했고, 자연스레 사람들의 평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인정을 받으려면 남들보다 뛰어난 실적을 거두어야 했으나 정작 치고 나가지는 못했다. 나로 인해 일이 뒤틀릴까봐 무서웠고, 내가 택한 방향이 옳다고 확신할 수 없었으므로 끊임없이 의심했다. 이 정도면 괜찮겠다 싶은 순간에도 고치고 또 고쳐가며 보석을 만들려 들었다. 이제 저자의 조언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좋다/나쁘다의 가치 판단 대신, 저자는 더 멋진 완벽주의자가 되기 위한 방법을 제시했다. 내 안의 목소리에 보다 귀 기울이고, 부러질 것처럼 굴던 완고함에 변화를 받아들일 줄 아는 유연함을 더할 것을 내게 주문했다. 내 자신에 대한 확신 위에 삶을 대하는 호기심을 더한다면? 두려움을 덜어내고 그 자리에 흥미로움을 채워넣을 수 있다면? 물론 이 또한 쉬울 리는 없다. 그래도 완벽주의 자체를 버리라는 요구를 받지 않아서 부담을 덜 느꼈다. 적어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았기에.

과거에는 박멸해야 할 무언가로 다수의 중병들이 거론됐다면, 지금은 이 또한 나의 일부로 이해하고 잘 관리하는 게 현명하단 식의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완벽주의 기질도 마찬가지 같았다. 내면의 완벽주의를 잘 다스린다면 마냥 불행하지는 않을 거라는 말이 내게 적잖은 위안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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