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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의 단어들

[도서] 이적의 단어들

이적 저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시작이 반이다. 한창 심호흡을 가다듬었으나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위로하기 위해 뭇사람들이 만든 표현 같다 믿었던 날이 있었지만 이젠 안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도 그리 쉽게 시작할 순 없음을 말이다. 흰 종이가 광활해 보이고, 아주 작은 점을 찍더라도 어디에 어떠한 크기의 점을 찍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주는 두려움은 실로 크다. 처음부터 너무 잘 하려 드니 부담이 생겨 그런 거라고도 하지만, 욕심 여하를 떠나 마음을 다스리는 거 역시도 실력의 일환이다. 수많은 곡 작업을 해 온 이에겐 과연 어떠할지. ‘이적’이라는 이름을 믿는다.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본다. 단어로부터 시작한 이야기들의 종착점이 궁금하다.

‘천부적 이야기꾼’이란 표현은 스스로 받아들이기에 살짝 민망하고, 그래도 마냥 어렵게 쓰이지는 않았을 듯하다. 생각의 순간이 태초에 있었을 것이다. 머릿속 정돈된 생각들을 글로 풀어내기까지의 시간이 어느 정도였을지를 상상하며 글을 접했다. 장이 달라질 때마다 색 또한 변했다. 특정 부분만을 읽고 바로 평을 시도했더라면 나의 사고는 심히 단편적이었을 거다. 묵직함이 가벼움이 되고, 또 다시 진솔함이 되는 마법과도 같은 시간. 내겐 그랬다. 마음의 준비가 채 이루어지지 않은 처음부터 인생이 읽혔다는 게, 나로서는 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소재 탓은 아니었다.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요소들이 마치 처음부터 한 몸이었다는 듯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의도였을까. 과도하게 의식했더라면 오히려 글은 전개되지 못했을 것이다. 촌철살인. 짧은 몇 마디에 메시지를 담아내는 일이 참으로 자연스러웠으니, 예를 들자면 이러하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스스로에게 가장 맞는 방식의 삶을 발견하는 일을 ‘짜파게티 끓일 때 물양 잘 맞추기’에 견준다거나, 잔칫집과 상갓집에 오르는 홍어로부터 삶의 기쁨과 슬픔을 논한다거나. 그가 전적으로 창조했건 어디선가 들었건은 그다지 중요치 않았다. 마음 안에 담아 두고 이따금씩 들추었다는 게 그의 삶과 나의 삶에 존재하는 차이로 이어졌을 것만 같아서 주목하게 됐다. 정답 아닌 의문으로 끝나는 글마저도 그러했다. 우리 앞에 놓인 ‘리셋 버튼’에 관한 이야기가 그러했다. 누름과 동시에 5년 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버튼이라 했다. 5년이라는 시간은 짧지만은 않아서 그 사이에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것이요, 제 생을 걸고 추구해온 무언가가 실패로 귀결되는 모습을 확인키도 했을 것이다. 게다가 젊음은 만인의 부러움을 살 법한 요소다. 망설이지 안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시도를 할 것만 같은데, 저자의 덧붙임이 나의 발목을 잡았다. 사귄 지 5년이 지나지 않은 이가 있다면 버튼 하나를 누름으로써 남이 될 수도 있다. 내 모든 걸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5세 이하 아이가 있다면, 그 존재를 부정하는 일도 가능해진다. 모든 밝음에는 어둠이 있다. 모두가 환호하는 빛도 그림자를 늘 대동한다.

개인적으로는 노래 가사의 탄생과 얽힌 이야기들이 가장 흥미로웠다. 4부 노래의 깊이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거위, 비, 하늘, 빨래, 매듭, 거짓말,… 이적이라는 가수와 뗄 수 없을 이 단어들이 어떠한 연유에서 저자의 선택을 받게 됐는지를 알게 됐다. 순간의 번뜩임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명쾌하진 않았을 수도 있겠으나, 세심하게 어르고 달래가며 내 안에서 만든 보석들이어서 노래의 제목이 될 수 있었다. 쉬운 듯하지만 비틀어 짜는 행위에 ‘충분히’라는 평을 하기란 쉽지가 않다는 거에 착안하여 ‘빨래’라는 제목을 노래에 붙였다는 저자의 설명을 한동안 응시했다. 우리 모두는 평온한 호수 위를 거니는 백조다. 아무도 수면 아래 바삐 움직이는 발들을 주목하지 않는다. 그저 우아함으로 기억될 이 삶이지만, 내가 고심했으며 고생했다는 걸 나만은 알아줄 것이다. 내가 나를 속여서는 안 된다. 내게 떳떳하게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은근 많다. 그래서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 하늘이 땅을, 땅이 하늘을 부러워하며 제 역할을 방기하지 않듯 나 또한 내게 어울리는 옷을 찾아 입고, 내게 부합하는 단어를 찾아 세상을 노래하며 살아야겠다. 여전히 세상은 알쏭달쏭하고, 내겐 번뜩이는 에스프리 따위는 없다. 허나, 조금 더 말 한 마디를 내뱉기 전 진중해질 것 같다. 적어도 책을 읽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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